2019년과 2024년 그 사이, 나와 세상에 일어난 변화 5가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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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3. 극도로 연결되고 단절된 사람들

앞서 말한 영상 콘텐츠의 시장 장악에 이어 체감하는 또 다른 두드러지는 변화는 소셜 미디어의 사용 양상과 그 영향력이다. 10대에서 30대까지의 데모그래픽에서 인스타그램은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내게 있어 인스타그램이란 너무 계속 제쳐두고만 있지는 말고 한 번씩 들어가서 보고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그리고 마침 그맘때 나도 ‘올릴 만한(이왕이면 좋은)’ 것이 있으면 뭔가를 올리는 식으로 한 번씩 날을 잡아 해내는 어떤 것이다. 내가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사람의 근황을 보고 응원의 마음을 담아 하트도 누른다.

서울시청 계정 이런 걸 제외한다면야 내가 실제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내 계정 상에는 없다. 게시물 추천 기능은 항상 30일씩 snooze 처리를 해서 내가 팔로우하지 않는 계정의 게시물은 보이지 않게 한다(그럼에도 광고는 피할 수 없지만…). 친구의 생일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선물을 주고 전화도 하는 그런 소셜라이징 카테고리에 인스타그램이 들어가 있다. 고로 ‘릴스를 넘기다 보면 몇 시간이 훌쩍 가버린다’는 친구의 푸념에는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 동조를 해주기 어렵다.

여기까지는 내 얘기. 그리고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인스타그램이 미치는 영향력은 많은 사람에게 갈수록 극대화되고 있으며, 실제로 우리 사회의 다양한 방면을 구체적으로 바꾸고 설계하는데다(모든 공간이 이제는 사진을 찍기 위한 장소로 설계되고 있다.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지자체마저 개천 산책로나 지역 축제 구석구석에 포토존을 설치하는 마당이다) 특히 우리 다음 세대에게 있어 상당 부분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서 주목할 그래프가 하나 있다. 성별, 연령대별로 나눈 17개국의 자살률 그래프다. 시계열 사이에 작은 글자로 적혀 있는 ‘인스타그램 설립됨’ 부분을 유심히 보자.

Suicide rates for girls are rising. Are smartphones to blame?, The Economist

 

여성 청소년의 자살률이 2014년쯤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났으며 20대, 30대 여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미국 여성 청소년 세 명 중 한 명은 진지하게 자살을 고려한 바 있으며, 전체의 60% 가까이가 우울증의 증상을 보인다. 성소수자 그룹 역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위 그래프의 출처인 이코노미스트 기사는 소셜미디어와 여성 청소년 자살률의 상관관계에 대해 다루는데, 이를 인용해 보도한 국내 언론에서는 마치 상관관계가 확실히 있다는 식으로 단정 지어 보도하고 있지만 원문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Correlation ≠Causation 상관관계가 곧 인과관계를 의미하지 않으며, 여러 가지 다양한 요소들을 함께 심층적으로 봐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러나 소셜미디어가 이들의 자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단 하나의 트리거라는 이야기는 아닐지라도, 동시에 소셜미디어의 일상적인 사용이 어떠한 문제를 가져오는지, 그리고 특히나 어린 청소년과 소수자 그룹이 여기에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연구 결과 역시 줄지어 나오고 있다. 공통으로 지적하는 문제점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나는 소셜미디어는 사람들을 “극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극도로 단절되게”
그리고 “극도로 드러나 있으며 동시에 극도로 숨겨져 있도록” 만든다고 생각한다.

연결도 이 정도로 극대화된 연결이 없다. 이 연결 덕분에 공적 영역에서는 각종 사회운동과 캠페인이 이를 동력으로 국경을 넘어 퍼져나간다. 사람들은 이제 물리적 위치에 구애받지 않고 의견을 공유하고 영감을 얻고 또 힘을 합친다. 그리고 이 극도의 연결과 극도의 드러남에는 명암이 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 나이대 중 상당수가 이렇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성차별’이라는 개념조차 잘 모르고 컸다. 그런 내가 어렴풋이나마 사람의 성별을 이유로 마구잡이로 혐오적인 생각을 할 뿐만 아니라, 이를 무려 입 밖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있다(나중에 알게 된 건데, 심지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게 열 셋넷 즈음이다. 인터넷 기사 댓글 같은 걸로 어렴풋이 기억하는데 여자는 집에서 밥이나 하고 밖에 나오면 안 된다, 뭐 이런 거였다. 지금은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이상 나이에 상관없이 이런 말과 글에 마구잡이로 노출된다.

동시에 이 연결은 무자비할 정도로 즉각적이며 동시적이고, 개인의 내밀한 사적 영역을 더 이상 개인의 것으로만 남겨두지 않는다. 타인이 공들여 가공해서 올리는 일상이 아니지만 일상으로 라벨링 된 이미지를 매일 눈앞에서 보게 된다. 예전에는 헐리우드 스타 정도나 공유되었을, 지구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오늘 입을 옷을 고르거나 프로포즈를 받는 모습 같은 것을 실시간으로 일상에서 목격한다.

여기서 비롯되는 정량화되는 개인의 삶, 계급의 도식화, 끊임없는 상대평가는 자연스레 내 눈이 아닌 타인의 눈으로 스스로를 끊임없이 검토하고 측정하게 한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 발병의 완벽한 토양이다. 뇌의 발달 과정상 시각적 자극과 중독 등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청소년은 물론이고, 성인도 여기서 자유롭기란 절대 쉽지 않다.

연결도 마찬가지다. 친구의 일상을 인스타그램 스토리로 매일 같이(마치 동네 한 바퀴 마실 다니듯) 둘러보며 하트를 누르지만,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건 언제인지 기억이 안 나는 경우도 많다. 그나마 소셜미디어 덕분에 우리는 ‘느슨하게나마’ 연결되어 있구나 안심하지만, 사실 소셜미디어는 내게 좋은 일 또는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바로 연락을 할 정도로 상대와 나의 거리를 유지시켜 주거나 좁혀주지 못한다.

IHeart (https://www.ihatestencils.com)

나는 이것이 ‘친교’의 영역이 아닌 ‘염탐’의 영역에 한 발 더 가까이 있다고 생각한다. 남의 창문 너머를 힐끗 보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지만,유일한 차이는 창문을 열어둔 사람도 다른 사람의 시선을 알고 있고 이를 허용하고 있으며(오히려 최대한 더 창문 안쪽을 봐주기를 원하기도 한다) 본인도 여러 개의 다른 창문 너머를 매일 같이 보고 있다는 것. 그러나 각자의 엉덩이는 앉은 자리에서 절대 움직이지 않는 채로, 서로의 집을 왕래할 일은 전혀 없는 채로. 이렇게 소셜미디어 속에서 사람들은 극도로 연결되어 있으면서 또 극도로 단절되어 있다.

동시에 모든 것이 드러나 있으면서도 숨겨져 있다. 소셜 미디어를 활발하게 사용하는 사용자들은 스스로가 도달하고자 하는 이미지, 일종의 페르소나와 같은 하나의 상을 설정하고 이 틀에 맞추어 소셜 미디어를 관리하며 운용한다(엔터테인먼트 매니지먼트사의 인적 상품 관리 방식과 여러 면에서 매우 흡사하다).

이렇게 모든 이미지는 철저하게 선택되고 가공되어 올라온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어떤 사람에 대해 알 수는 있겠으나(정확하게는 그가 어떻게 ‘보이고 싶어 하는지’) 소셜 미디어가 그 사람을 정말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온라인의 만들어진 상을 기반으로 한 친교는(소위 인플루언서를 따르는 경우처럼 그 친교가 양방향이 아닌 단방향인 경우에도) 상당 경우 많은 부분, 특히 관계에서의 핵심적인 부분을 놓치게 된다. 그 철저하게 가공된 상을 잣대로 삼는 것이 나의 삶과 사람 간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는 상황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결국 이 모든 것은 앱 사용 시간 및 빈도와 광고 노출 정도로, 인플루언서를 위시한 마켓과 공동 구매 사업으로, 길거리 현란한 광고판이 내 침대 위 내가 잠들기 직전까지 바라보는 스크린으로 옮겨온 것으로 귀결된다.

소셜미디어가 여성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으로 시작해서 특히 부정적인 측면에 집중해 풀어낸 내 생각과는 별개로, 소셜미디어 그중에서도 인스타그램과 그 이용자의 다층적인 면에 대해 알고 싶다면 강력하게 추천할 책이 있다. 김지효 작가의 <인생샷 뒤의 여자들>이다. 다양한 각도로 주제를 해석하고 무엇보다 재밌다. 아래에 살짝 옮기는 서문의 일부만 봐도 당장 읽고 싶어질 것이라 자부한다. 이 책은 작가가 인스타그램 인생샷 문화에 참여하거나 참여했던 20대 여성 12명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진행된 연구의 결과물이다.

진짜로, 나는 인스타그램에서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다. 내 인스타그램을 볼 일이 영영 없을 사람에게 스토리로 말을 걸고(“오늘 카페에서 잃어버린 지갑 찾아주신 분<3 정말 감사합니다. 복 받으세요!”) 생일선물을 준 친구에게 직접 감사 인사를 전하기보다는, 오늘이 내 생일인지도 몰랐던 수백 명의 팔로워를 향해 고맙다는 글을 올린다(“오늘 과분하게 많은 축하를 받으면서 제가 얼마나 사랑받는 사람인지 느꼈어요. 감사합니다”)

(…) 셀카를 올릴 때는 조금 더 치밀해진다. 나는 수백 장 찍어 겨우 한 장 건진 사진을 어쩌다 우연히 찍힌 사진인 마냥 포장해 업로드한다 (…) 인스타그램에서 나는 내가 주인공인 화보를 연출하는 감독이자 셀카를 성형하는 디지털 집도의가 된다.

– 김지효 저 <인생샷 뒤의 여자들> 2023, 오월의봄

단절과 외로움에 대해 하나 더 말을 얹자면, 이제는 관계도 플랫폼에서 이루어진다. 영역별로, 타겟층별로 각양각색이다. 쉽게 떠올리게 되는 네이버 밴드, 당근 동네생활부터 카카오톡의 각종 오픈채팅방으로 이뤄지는 각종 모임, ‘소모임 서비스’라는 카테고리 안에 우후죽순 생겨난 각종 서비스(소모임, 이모저모, 문토, 1km, 소행성, 오이 등). 하다 못해 블라인드나 에브리타임도 그렇다.

책 <고립의 시대>(2021, 노리하 허츠 저)의 부제인 ‘초연결 세계에 격리된 우리들’처럼, 모두가 이렇게 맘만 먹으면 너무나 쉽게 연결될 수 있는 것 같은 지금 실상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고 극도로 단절된 이 현실이 아이러니하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광고로, 소비로, 사람의 외로움과 단절을 먹으며 기업의 이익으로 치환되고 있다.

 

변화 4. 나: 정신만큼 소중한 몸

나 개인에게 일어난 변화 중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내가 나의 신체에 매기는 중요도와 내 몸을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다.

이전까지 나에게 있어 몸은 항상 정신 그다음으로 위치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이나 데카르트까지 갈 것 없이,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줄곧 그렇게 몸과 정신의 이분법이라는 틀 안에 들어앉아 있었다는 걸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적 관점에서 본질은 정신이고 이성이며, 인간의 신체는 부차적이고 감정적이며 욕망을 담은 것, 그리고 무엇보다 신체는 비본질적이라는 이분법이었다.

작동을 어느 정도 한다는 가정하에 굳이 그 이상으로 이 신체에 내가 어떠한 노력을 기울 필요가 있을 것인지, 그 시간에 책을 한 권 더 읽는 것(신체가 아닌 정신에 도움이 되는 일에 유한한 시간을 쓰는 것)이 더 유익한 일이 아닌지, 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정말 속 편하게 살던 내가 몸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있었으니. 허리 디스크와 공황이 내 삶에 들이닥쳤다.

간단히 정리해서 말하자면, 그 이후로 말 그대로 밥 먹고 잠자고 일하는 필수 활동을 제외한 여가 시간의 대부분은 운동하며 보냈다. 필요에 의해 시작했던 운동이 이제는 내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요소가 되었으며, 내 삶의 상당 부분을 탄탄하게 받들어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햇수로는 4년차가 되면서 이제 꽤 한다, 싶은 운동도 생겼고 작년부터 새로 빠져들어 시작한지 이제 딱 일 년을 채운 운동도 있으며 그 사이 어디엔가 스쳐 지나간 수많은 운동이 있다. 이를 토대로 2023년에는 운동하는 여성을 잔뜩 담아낸 영상 작업도 하나 했다. 이 작업기와 내 일상과 함께 하는 운동이라는 주제에 대해서도 차근차근 기록을 시작하려 한다.

같은 결에서 최근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는 주제가 신유물론 페미니즘이다. 신유물론 페미니즘은 물질세계의 능동성과 관계성을 강조하는 신유물론의 관점을 바탕으로, 기존의 페미니즘이 상대적으로 간과했던 물질세계, 특히 여성의 몸과 노동 같은 부분들을 조명한다. 여기서 과학기술과 여성 간의 관계 방면에서 매우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하고 계시는 임소연 과학기술학 박사님의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는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추천하는 책이다. 세상은 넓고 공부할 건 많다. 공부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겠다.

나는 성형수술 연구를 위해 청담 성형외과에서 3년간 일하면서 성형수술을 받았다. 이 책은 성형수술과 내가 얽혀버린 이야기이다.

나는 ‘선택’ 이후 여성의 삶이 궁금했다. 어째서 성형수술의 동기에만 관심이 있고, 성형수술의 과정과 결과에는 관심이 없지?

– 임소연 저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 2022, 돌베개

 

변화 5. 나: 일로 만들어내는 성과보다 더 중요한 것

이것도 앞으로 블로그에 기록해 나갈 주제다. 그러니 여기서는 짧게만 정리하고 두 개로 나누었는데도 이미 길어진 이 글을 마무리할 차례.

바로 위에서 추천한 <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의 저자 임소연 박사님과의 담소 중에 나왔던 이야기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일에서의 성과(예를 들어, 어떤 영화제에 내 다큐멘터리가 걸린다던가 수상을 한다던가 하는)만 확실하게 이룩해낸다면 바로 그다음 날 생을 마감해도 관계없다고 줄곧 생각해 왔다. 그런 종류의 무엇이 아니고서야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내 머리로는 대관절 알 수가 없었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거듭 같은 결론이 났다. 어떤 식으로든 이 세상에 이왕이면 좋은 방식으로 기여하고 그게 내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라면 더더욱 좋을 것이고, 그런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이었다.

이러한 나 개인의 신념과는 별개로 비슷한 결에서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회의를 넘어선 이해 불능 상태 역시 계속해서 이어졌다. 요즘 다시 즐겨보고 있는 EBS <위대한 수업>의 주디스 버틀러 편에서 그가 말하듯(Sex should not predict what a person’s life will be.) 태어났을 때 정해진 성별이 그 사람의 일생 전체를 규정하고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고 결정짓는 광경을 꾸준히 목도했다.

당신은 여성으로 태어났으니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건 당신의 생물학적 성별로 인해 특정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전통적 가족 형태와 이성애를 따르고 남성 권위에 복종하고 불평등한 권리를 견디고 남성보다 덜 가치 있는 존재로 산다는 느낌을 받아들여야 하죠.

– EBS <위대한 수업> 주디스 버틀러

특히 난다긴다 하면서 동시에 주변에도 너무나 많은 영감과 응원을 나누던 여성이 별안간 결혼을 통해 가부장제라는 제도로 편입되자마자 스스로의 영역과 관심사,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가정 내로 대폭 축소하여 설정해 버리는 사례를 보며 물음표는 늘어만 갔다. 당시 내 눈에 이건 이 사회와 연결된 중요한 유기체인 한 명의 독립된 인간이 별안간 몇천 년 뒤로 인류사가 훌쩍 후퇴하여 내 배우자, 내 아이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원시 부족사회로 회귀하는 광경을 보는 것, 그리고 그러한 가부장제 구조의 낭떠러지로 시스템이 사람들을 차곡차곡 걷어 차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이성애 결혼은 애초에 차치하고서라도, 그 어떤 경우에라도 여러 의미에서 가정을 가진다는 것이 딴 사람은 몰라도 나에게는 내 세계의 확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자연스럽게 내린 상태였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살았다. 할 게 많은데 내가 돌보고 신경써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긴다는 건 자연스레 내 에너지와 시간의 분산을 의미했다.

그러다 지난 몇 년에 걸쳐 여러 일을 겪으면서 이제는 조금은 알게 된 것이 있다. 삶에는 일로 만들어내는 성과와 성취만큼,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다고. 물론 여기에도 일로 성취를 얻기 위해서만큼이나  여러 가지 많은 조건과 때로는 운, 요구되는 노력 그리고 환경적인 측면도 필요하지만, 여하튼 그렇다. 결론적으로 나는 가정을 꾸리려 하고 한국에서는 법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지만 보통 일반적으로 말하는 결혼이라는 것을 앞으로 일 년 정도에 걸쳐 준비하게 될텐데(인생 참 모를 일이다), 이 과정도 차근차근 기록을 할 수 있는 부분은 기록을 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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