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범죄 다큐 작업기(4) 세계 여성의 날 타임지에 공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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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프로덕션 

촬영 단계에서는 제작사와의 커뮤니케이션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다 편집이 시작되면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메일이 오가고 틈나는 대로 스카이프콜로 의견을 나누고 피드백을 받으며 작업이 진행되었다. ‘역시 진짜 힘든 건 프로덕션이 아니라 포스트 프로덕션(후반 작업)이구나’라는 진리를 새삼 되새겼다. 

전반적으로 계속 이어졌던 내러티브 상의 문제가 있었다. 주인공을 소개한 후 실제 사건으로 넘어가기까지 텀이 좀 있다 보니 흐름이 늘어진다는 점, 영화의 클라이막스인 시위 장면부터 엔딩 사이의 작은 이야기 조각들을 어떻게 산만하지 않게 배치할지 이 두 가지였다. 

제작사 측에서 편집 후반부 즈음에 컨설팅 에디터(Hannah Buck)를 모셔 오면서 한 번 더 전체 내러티브가 수정되고 전체 구조가 좀 더 확실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매번 참 신기한 건데 ‘이게 최선이다, 이 정도면 되었다’ 싶었을 때도 또 어떻게든 고치고 다듬고 나면 ‘이걸 고치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나’ 할 만큼 이야기가 한층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마치 큰 바윗덩어리 하나를 끊임없이 깎고 깎고 또 깎으면서 조각하는 느낌이다. 혹시나 그러면 어쩌나 했던 것과 달리 제작사, 컨설팅 에디터, 그리고 나 사이에 편집 방향에서의 이견은 크게 없었다.

다만 의견이 엇갈렸던 것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엔딩 즈음에 등장하는 J와 J의 어머니가 함께 등장하는 씬이었다. 영화에는 두 명의 불법촬영 범죄 피해자 J와 P가 등장하고 인물 별로 각각 설정한 엔딩이 있었다. P가 다양한 영역에서 정치활동을 펴가는 것이 하나고, J와 J의 어머니가 대화하는 씬이 바로 J의 엔딩이었다. 헌데 책임 프로듀서인 샬롯은 이 씬을 통째로 빼기를 원했다. 제작사 내부 리뷰 결과 의견은 반반이었고, 책임 프로듀서는 원하지 않고, 반면 한국에서 나와 함께 작업한 제작진들은 모두 이 씬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황. 

컨설팅 에디터, 그리고 후반 작업 중에도 계속 꾸준히 의견을 나누었던 J와도 거듭 상의한 결과 이건 아무래도 문화적인 차이도 있지 않나 하는 결론이 나왔다. 개인 영역에서의 엔딩이 아니라 굳이 가족 구성원이 엔딩 파트에서 함께 해야 하는지, 자칫 과도하게 감정적으로 흐를 수 있다는 의견과 같은 여성이자 부모로서 J의 어머니가 J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과정이 엔딩으로 적합하다는 두 의견이 맞섰다.

이 영화의 타겟을 국내로 설정하고 작업을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에(처음부터 이 방침은 확고했다. 이 이슈가 이미 한국에서는 여러 매체와 단체, 활동가 등을 통해 잘 알려져 있다고 생각했고 이제 필요한 건 이 의제의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라 판단했다) 제작사의 의견을 좀 더 듣자는 쪽으로 결정이 기울었지만 완전히 해당 씬 자체를 삭제하는 것은 내러티브 상 어려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이 씬이 마음에 들었다. 여러 차례 조율에 조율을 거듭한 결과 마지막 분량을 대폭 (내가 당시 느꼈던 심정으로는 줄여도 줄여도 더 줄일 게 정말 단 1초도 없을 때까지) 줄이되 해당 씬은 삭제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팩트체크 

픽처 락(더 이상의 편집을 추가적으로 할 수 없는, 편집이 완전히 마무리된 단계)이 걸렸고, 이제 다음 차례는 대망의 팩트체크였다. 편집이 끝나고 릴리즈 하기 전에 제작사에서 별도로 고용한 저널리스트/팩트체커의 전체적인 팩트 체크를 걸치는 과정이었다. 제작사와 계약을 할 때부터 이 부분은 충분히 설명을 들어서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지만, 이렇게까지 꼼꼼하고 방대한 양을 다룰 줄은 생각도 못 했다(다시 보니 Fact-check 라는 제목의 이메일 체인에만 58개의 이메일이 들어가 있다). 

먼저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대사, 화면 구성요소, 텍스트 카드, 오디오 등)을 싹 다 하나의 문서에 정리해야 했다. 등장인물이 모두 한국어로 말하다 보니 우선 한국어로 정리한 후 영문 번역본을 함께 기입했다. 각 씬의 장소를 정확하게 모두 적고 등장하는 음악과 사운드, 그리고 컷 별로 화면에 등장하는 구성 요소들을 함께 적어 넣었다. 

팩트체크 문서 일부

지난한 팩트체크 과정은 총 6주 정도 소요되었다. 나는 통계가 화면에 등장하는 구간에선 해당 통계의 근거 자료들을, 통화 녹음본이 나올 때는 녹음본 원본을, 등장인물의 직위 확인을 위한 인터뷰이의 명함 등 관련 자료들을 요청받는 대로 모두 제출했다. 팩트체크는 ‘이런 것까지 다시 확인한다고?’ 싶을 정도로 세세하게 이루어졌다. ‘OO년 OO월 OO일부터  XX 차례에 걸쳐 시위가 진행되었다’는 등장인물의 발언 부분에는 팩트체커가 관련 보도 등을 샅샅이 뒤져서 해당 부분에 주석으로 기입하고 사실관계를 파악했다는 clear 표시를 했다. 서울지방경찰청이 등장하는 씬은 구글 맵을 확인해서 정말 이 화면에 등장하는 게 그 건물이 맞는지도 체크한 후 마찬가지로 claer 표시를 했다. 전체 내용 역시 팩트체커 사이드의 번역가가 한 번 더 번역을 거쳐서 내용을 검증했다. 

복잡다단했지만 차근차근 진행이 되고 있던 팩트체크 과정에서 일어난 재밌는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7, 8초 사건’이다. J의 인터뷰 내용 중에 ‘경찰관이 카메라에서 한 7, 8초 정도 되는 영상을 보여주더라고요’라는 부분이 있다. 팩트체커가 자꾸만 이 부분이 The police officer showed me 7, 8-second footage on the camera 가 아니라 18 second footage 라고 구글 문서에 코멘트를 달고 수정을 요청해 왔다. 이상하다 싶어 해당 오디오를 재차 들어보고 J와도 확인을 거쳤지만 이건 분명히 18초가 아니라 7, 8초였다. 뭔가 싶어 결국 스카이프콜까지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팩트체커측의 번역가가 ‘칠-팔-초’를 ‘십-팔-초’로 듣고 번역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한국어를 모르는 팩트체커에게 하나하나 이 발음의 유사성을 설명하고, 사건 관련 근거자료를 보여주고 나서야 여기에도 clear 표시가 되었다. 

이런 해프닝 등을 겪으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 정도까지 한다고?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전혀 없다고는 못하겠다. 그러나 이 정도의 내부 프로세스는 있어야 픽션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기반한 다큐멘터리를 내놓을 수 있는 게 아닐지, 이 정도의 책임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 아닌지 하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실제 사건이나 인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들은 종종 그 진위성이나 편향성 여부를 놓고 시시비비가 일어나곤 한다. 팩트체커의 검증 과정은 누군가가 영화에서 A라고 말했을 때 이게 A이겠거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A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영화에서 다루는 이야기 중 객관적인 사실 부분의 진위성은 충분히 이런 팩트체크 과정을 통해 많은 부분 정리 및 소명이 되리라 생각한다. 

 

마무리 작업

어찌저찌 복잡했던 팩트체크 파트가 드디어 마무리되고 (제작사 측에서 팩트체크가 완전히 끝났다는 이메일을 받았을 땐 정말 기뻤다! 드디어 끝났다!) 마지막은 제목이었다. 작업하며 사용한 프로젝트명은 Jieun 이었는데, 편집 마무리 단계에서 우리 쪽에서 제안한 정식 타이틀은 Watched 였다. 제작사와 상의한 결과 다소 밋밋한 감이 있고, 동명 타이틀의 다른 영화가 있는 점 때문에 기각되었다. 

제작사와 한국 제작진 양쪽에서 총 열 개 정도의 타이틀 후보를 리스트업 했고, 그 중 마지막까지 물망에 오른 건 아래 세 개였다. 

  • INTRUSION
  • OPEN SHUTTERS
  • MY LIFE IS NOT YOUR PORN (이건 아무래도 제목에 직접적으로 들어가는 단어가 문제가 되다 보니 기각되었다)

논의를 거쳐 창문을 가리는 shutter 와 카메라 셔터의 shutter 이 두 가지 중의적인 의미를 담은 제목인 Open Shutters로 최종적으로 의견을 모았다. 

타이틀과 엔딩 크레딧에 올라갈 텍스트까지 상호 간의 컨펌이 끝나고(엔딩 크레딧의 Special Thanks 마지막에 화면에 등장하는 “AND ALL THE BRAVE SISTERS WHO JOINED THE RALLIES”는 지금도 볼 때마다 뭔가 찡하다), 오디오 믹싱과 컬러 코렉션 작업에 들어가니 정말로 이제 끝을 향해가는구나 싶어졌다. 항상 믿고 맡기는 고요사운드웍스의 이인경님이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오디오를 잡아주셨고, 컬러는 김선형님께서 멋지게 잡아주셨다.

믹싱에서는 오디오 대사의 깔끔한 전달뿐만 아니라 김수정 작곡가님이 열과 성을 다해 작업해주신 음악을 스토리와 함께 임팩트 있게 살리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컬러는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전달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보니 제작사와 레퍼런스를 같이 찾고 계속 체크를 해나가며 진행했다. 선형님께서는 영화의 전반 후반을 나누는 시위 장면을 기준으로 앞부분은 서늘할 만큼 푸르게, 뒷부분은 시위에서 도드라지는 붉은 컬러로 후반부 전체에 걸쳐 아름답게 녹여주셨다.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하나의 결과물을 잘 내놓기 위해서는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진 멋진 분들을 어떻게 모셔 오고 어떻게 그분들이 가장 편하게 작업할 수 있게 어레인지 하는지, 어떻게 각각의 작업물이 유기적으로 만나게 하는지가 관건이다. 이런 분들이 없다면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프랑스 통신사 AFP 기자로 계셨던 정하원 기자님께도 항상 감사한 마음이다. 재판 최종 공판일에도 직접 오셨으며 해당 사건에 대해 꼼꼼히 체크 및 취재를 하시면서 얻은 몇몇 중요한 정보들을 공유해주신 덕분에 이 다큐멘터리가 더 탄탄하게 만들어질 수 있었다. 

제작사 역시 전체 과정에 걸쳐 엄청나게 큰 도움을 주었다. 제작비도 제작비지만 일단 제작사가 없었다면 완성도 측면에서도 많은 부족함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책임 프로듀서인 살롯은 영국에서, 나와 가장 많이 소통했던 크리스틴과 샤키라는 미국에서 한국에 있는 나와 함께 소통했다. 거대한 삼각형의 물리적 거리였지만 없어서는 안 될 서포트를 받았다. 특히 매번 힘들 때마다 살뜰히 챙겨준 크리스틴과의 스카이프콜, 이메일은 큰 힘이 되었다. 

영화의 시작이자 끝인 J.
지은님은 말할 것도 없다. 지은님의 용기와 제안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시작되지 않았을 프로젝트다. 용기있게 이야기를 나누어주신 은수님과 함께 지은님은 메인 등장인물이자 크리에이티브 컨설턴트로 참여 했으며, 재판 과정에도 제작 과정에도 꿋꿋하게, 그리고 멋지게 임했다. 

 

대망의 3월 8일 릴리즈 

모든 작업이 마무리된 시점은 2021년 중반부였으나, 제작사 측에서 진행하는 다른 영화들의 릴리즈 스케쥴 등으로 인해 공개가 미뤄졌다. 나는 어차피 2022년으로 미뤄질 거라면 세계 여성의 날로 하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2022년 3월 8일 릴리즈가 최종 결정되었다. FOV는 Open Shutters를 포함 대부분의 영화를 단편으로 제작하며, 극장 개봉은 하지 않는다. 다큐멘터리의 경우 극장 개봉만을 고집했을 때 만날 수 있는 관객의 수가 극히 협소한 탓이 크다. 대신 제작사에서는 영화 하나마다 그 영화의 이야기를 잘 알리고 소셜 임팩트를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미디어 파트너를 한 곳씩 공동배급사로 참여 시켰다.

<부재의 기억>은 뉴욕 타임스와 함께 했는데 다른 곳도 아니고 뉴욕 타임스다 보니 그 파급력이 상당했다. Open Shutters 역시 뉴욕 타임스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참 좋았겠지만, 같은 곳을 뒤이어 하기에는 여러가지 풀기 어려운 내부 사정이 있었다. 내가 영향력, 현실적인 가능성 및 미디어가 자체적으로 만들어내는 다큐멘터리 콘텐츠의 완성도 등을 따져 희망하는 곳으로 뽑았던 것은 두 곳이었다. 더 가디언과 타임.  

제작사의 노력 덕분에 최종적으로 타임지가 미디어 파트너이자 공동배급사로 확정되었고, 3월 8일 릴리즈에 맞추어 나갈 수 있도록 타임지와의 인터뷰도 진행되었다. 

*글과는 큰 관계 없는 사족: 당시 한국은 3월 9일 20대 대선으로 정신없이 정국이 돌아가고 있었다. (Open Shutters가 내 인터뷰 기사와 함께 공개되기 며칠 전 당시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대표의 인터뷰가 타임지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윤석열 당시 후보에게도 취재 요청이 들어갔는데 캠프 쪽에서 거부했다고 한다) 때가 때라서 그런지 릴리즈 당시 진행했던 외신과의 인터뷰에서는 이번 대선과 한국의 여성 대상 범죄, 여성 인권을 주제로 한 질문을 빠지지 않고 받았다. 당시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성평등을 염원하는 이들이 느낀 대선 선거운동 과정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구조적 차별은 없다느니, 저출생이 페미니즘 탓이라느니, 온갖 듣도보도 못한 소리들이 극심한 소음으로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그래서 당시 내 인터뷰 내용을 다시 보면 ‘내가 이때 많이 화가 나 있었구나’하는 게 새삼 느껴지곤 한다(타임지 인터뷰의 내 답변에는 무려 ‘f-cking crazy’가 들어가 있다.. 화상통화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기사가 나온 걸 보고서야 아, 내가 이런 말도 했구나 싶었다).

3월 8일 다큐멘터리와 함께 릴리즈된 인터뷰

안 올 것 같던 2022년 3월 8일이 드디어 오고, 제작사와 타임지를 통해 Open Shutters 가 드디어 릴리즈되었다. 여러 영화제와 커뮤니티 스크리닝 등을 통해 영화가 많은 관객과 만났다. 이렇게 2018년부터 시작된 작업이 마무리가 되었다. 아무쪼록 이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길 바랬다. 그 여정에서 만나고 또 함께 해주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Open Shutters는 타임지와 Field of Vision 웹사이트에서 풀버전으로 감상할 수 있다. 

 


지금 2024년 1월의 나는 릴리즈일로부터 거의 2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이 작업 기록을 정리하고 있다. 모름지기 작업 기록을 정리해서 남겨 놓지 않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기억이 모두 퇴색되어 버리기에 이전 작업도 그랬고, 책도 그랬고, 항상 작업 기록은 남겨왔는데 어쩌다 보니 이걸 이제야 마무리지었다. 정말 오랜만에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지금, 앞으로는 미루는 일 없이 차곡차곡 기록을 남겨갈 계획이다.

다음 작업을 시작하기 전까지 해야 할 일들이 많다. 2024년 청룡의 해를 맞이하여 모두가 자신이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과 어떤 식으로든 의미 있는 영향력을 주고받는 한 해를 보낼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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