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방지용 로드트립 노트#2] 길에서 얻은 우리 삶의 모양새에 대한 몇 가지 생각

>>[망각방지용 로드트립 노트#1]8000km를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여행 정보야 어디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니,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느꼈던 몇 가지 생각들만 정리.

 

1. 대자연 안에서의 하루

서호주 로드트립을 하는 동안의 내 일과는 이루 말로 할 수 없이 간단했다. 해가 뜨면 내 작은 텐트 안에서 나와 해변가를 걷거나 산에 오른다. 알람같은 건 필요 없다. 저절로 눈이 떠지니까. 일출을 감상하고 슬렁슬렁 텐트로 돌아오면 일행들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내민다. 빵과 과일로 다같이 아침을 먹고, 지도 한 장 달랑 펴놓고 달린다.

바다나 강, 폭포, 산, 동굴이 있는 곳에서 잠시 차를 멈추곤 걷고 또 걷고 헤엄을 치다 아침에 미리 싸온 점심을 먹는다. 다시 차에 올라타 가고 싶은 곳을 쏘다니다 해가 지기 전에 캠프장이나 평지를 찾아 텐트를 치고, 저녁을 먹고, 모닥불을 피운다. 나는 찻잔을, 나머지는 맥주병을 각자 손에 든 채로 불 곁에서 도란도란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어느 순간 모두 말이 없어지고 하늘에서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별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각자 생각에 잠긴다. 하나둘 각자의 텐트나 나무에 묶어둔 해먹으로 가서 잠을 청하고, 다음 날 다시 해가 뜨면 같은 일과가 반복된다.

나를 둘러싼, 매일 다른, 사람의 손길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온전한 대자연은 때때로 숨이 막힐만큼 거대하게 내게 다가왔다. 그 한 중간에 덜렁 내던져진채로 무력하면서도 가슴 두근거리는 요상한 기분을 매일같이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바다의 모습이 마치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만큼이나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이번 여행에서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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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고 인간의 생존력과 호기심에 대한 경외

자연만큼이나 내게 놀랍게 다가온 건 인간의 생존력과 끝없는 호기심이었다. 사륜구동 차량만 통행이 가능한 길이 아직 많기는 하지만, 이만큼 길을 닦아놓은 것만 해도 애초에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하는 생각이 여행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며칠 내내 달려도 물도 전기도 음식도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그리고 이 길마저 없었을 그 때 어떤 사람들이 어떻게 이 길을 하나하나 닦았을까.

Red Bluff 라는 곳이 있다. Kalbarri의 절벽지형인 Red Bluff 말고, 맵에서도 찾기 어려운 그런 곳이다. Carnarvon에서 북쪽으로 100km 정도 위로, 아무것도 없는 말 그대로 황야에서 비포장 도로(말이 도로지 그냥 주변보다 돌덩이가 좀 적게 있는)를 몇 시간 꼬박 달리면 절벽들 사이에서 갑자기 작은 마을 하나가 불현듯 나타나는데, 사실 마을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것이 집 몇 채와 야자수 잎으로 얼기설기 엮은 오두막 몇 채가 다다.

흡사 폭격이라도 벌어지고 있는 듯 엄청난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파도, 그리고 독특한 지형탓에 절벽 끝에서는 완벽한 배럴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서퍼들이 모여 작은 커뮤니티를 이루어 살며, 말 그대로 자연과 혼연일체가 되어 지내는 곳이었다. 이런 곳에 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애초에 세상에 아예 태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증발해서 사는 게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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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마지막으로, 삶이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가에 대하여

서호주는 호주 안에서도 진짜 아웃백을 체험할 수 있는 오지 중의 오지다. 차로 며칠을 꼬박 달려야 사람 사는 마을이 나오는 게 농담이 아닌 참말인 곳이다. 식량 보급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도 그렇고, 샤워시설은 커녕 푸세식 화장실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운이 좋은 날일게다. 물론 운좋게 해가 질 때 즈음 각종 편의 시설이 갖춰져 있는 숙박시설(유료 캠프장, 캐러밴 파크, 마을 안의 호스텔 등)을 만날 수 있다면야 이제까지 누려왔던 각종 문명의 혜택을 죄다 엇비슷하게나마 누릴 수 있다.

허나 첫번째로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로드트립에서마저 기존의 삶을 방식을 고수해야 한다는 생각은 대부분 하지 않고, 덧붙여 시설 대비 만만치 않은 가격 등의 이유로 무료 캠프장을 택하는 경우가 많으며, 둘째로는 지역에 따라 저런 옵션이 아예 없는 곳이 많아 달리 방법이 없는 경우도 많다.

로드트립을 시작하고 첫 주는 전혀 샤워를 하지 못했다. 먹을 물도 모자란 판에 샤워는 무슨 샤워란 말인가. 바다에서 한참을 풍덩거리며 놀다 그대로 햇볕 아래서 대강 몸을 말리고 수건으로 소금기나 대강 털어내는 식으로 며칠을 지내다 보니 딱히 별다른 불편함도 못 느꼈다. 수돗물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 수통에 물을 좀 채울 수 있을 때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수건에 물을 적셔 최소한의 위생은 유지하는 식으로 지냈다.

그러다 보니 이제껏 내가 아무렇지 않게 사용해 왔던 물의 양이 떠올랐고,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나 가볍게 살 수도 있는 것을.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삶에서 아무런 자각없이 쓰고 버리고 또 사는 것들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많은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호주서 철거난민 된 이야기, 이사 그리고 내 소유물의 무게). 이번에도 길에서 참 많은 것들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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