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주에 있는 내내 머무른 내 바닷가의 집은, 서핑은 자주 하고 싶은데 운전은 못 하고 그러니 보드를 들고 다니기 편하도록 바다 바로 앞에 살아야겠다는 어떻게 보면 참 단순무식한 한가지 조건을 걸고 살 곳을 찾던 내게 적시에 나타난 최적의 장소였다.
헌데 하나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으니 시 측의 도시계획에 따라 이 근방이 재개발에 들어갈 예정인고로 하반기에는 모든 입주자들이 집을 비워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리 알고 들어오긴 했으나 이래저래 집주인의 개인 사정 등으로 일정이 앞당겨지면서 졸지에 6월까지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호주에서 철거난민(?)이 되어 보다니 참 다이나믹하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던 그 동네의 그 집에서는 집주인과 싸움이 붙으면서 나중에는 나를 겁줄 요량으로 집주인이 자기 아들과 한무리의 아들 친구들까지 동원했고, 그 상황에서 내 친구들이 날 구하러(?) 달려오고, 경찰 부르고, 결국 오밤중에 택시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와는 다리 하나로 이어진 섬 Treasure Island의 친구 집으로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도피를 했던 일도 있었다. 그리고 한동안 말 그대로 섬생활을 했었더랬지, 참 아름다운(..) 추억이다.
요즘은 한번씩 돌발상황에 부딪칠 때마다 다른 것보다 이럴 때 내가 성장이란 걸 하긴 하고 있단 걸 깨닫는다. 계획을 미리 세워두고 거기서 조금만 틀어져도 엄청난 자괴감과 스트레스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위경련에까지 시달리던 예전과 달리 시간이 갈수록 예측하지 못했던 일들에 무덤덤해진다. 이번에도 통보를 듣고 나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플랜B를 찾기까지 걸린 시간이 꽤 짧았으니, 그간 헛으로 보고 듣고 겪은 게 아니구나 싶어 다행이기도 하고 그렇다.
히스 레저가 살아 생전 제일 좋아했다던, 그리고 그의 장례식이 치뤄졌던 아름다운 Cottesloe Beach에 자리한 친구네 가족(이 집 사위는 알고 보니 히스 레저의 절친이었다)이 집 찾을 동안 우선 짐싸서 들어오라고 손을 내밀어 줬고, 뒤이어 참 고마운 사람들 몇 명이 이래저래 도움을 주겠다고 했다(여긴 땅덩어리가 넓은 탓인지 어지간한 가정집에는 대개 손님방 하나 정도는 다 있다).
그러다 지난번 행사 관련 출장으로 함께 한국에 다녀왔던 회사 동료네 집에 놀러 갔다가 그 친구의 친구를 만났고, 마침 그 친구네 가족이 몽땅 프랑스로 장기 휴가를 떠나니 그 동안 집을 봐주었으면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거기다 그 집은 내가 살던 곳에서 더도 덜도 말고 딱 두 블럭 떨어진 곳에 있었다. 자그만치 2차 세계대전 전후에 지어진 집이라 군데 군데 세월 흔적이 보이고, 어두컴컴한 복도를 따라 방들과 부엌, 세탁실, 욕실과 화장실을 찾는게 마치 미로찾기를 연상시키는 딱 그 시대 양식의 집이다. 바다에서는 두 블럭 멀어졌지만 햇살이 한참 머무는 마당과 바로 앞에 자리한 공원이 마음에 쏙 든다.
수트케이스와 배낭을 들고 한번 움직이자 이사가 끝났다. 짐정리를 하면서 그 새 또 지난번에 공항에서 무게를 쟀던 때보다 짐이 확실히 늘었단 걸 깨달았다. 물건 하나를 살 때도 최대한 짐을 안 늘리려고 사용 기간, 무게, 크기, 패키지(샴푸 하나를 사도 사용할수록 부피가 줄어드는 튜브 제품을!)등을 따져서 사는게 습관이 되어 있는데 아무래도 한계가 있나 보다.
다음달부터 한동안 여행 안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고, 이번엔 특히 튼튼한 몸과 최대한 가벼운 짐의 조합으로 떠나야 하는 약간 험한 길인지라 사전 점검도 할 겸 꼼꼼히 짐을 체크했다. 수트케이스 하나에 넣어 보관을 해둘 짐 따로, 나와 함께 움직일 짐을 따로 분류하고, 부피와 무게를 줄일 수 있는 건 줄일 수 있는데까지 최대한 줄이고 조금이라도 필요가 없겠다 싶은건 싹 버리는 작업도 함께 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부터 짐을 싸고 풀고 이동하는 일이 생활이 되면서 생겨난 습관이랄지 요령이랄지 이제는 워낙 익숙하다(스무살부터 몇 달 이상 머물렀던 곳을 기준으로 해서 기억이 나는대로 이사 횟수를 세어보니 지금껏 족히 스무번은 거뜬히 넘는 듯 싶다).
예전엔 정서적인 가치를 기준으로 물건을 보관하고 있던 경우가 많았어서 편지, 사진, 녹슨 장신구, 명찰, 인형이나 책은 물론이고 하다 못해 선물받은 물건에 달린 리본 조각 하나도 따로 박스를 만들어 꼬박꼬박 모으곤 했다. 꽃다발이 시들면 꽃잎 몇 개를 따다 따로 말려 보관할 정도였으니 각종 물건들에 내가 임의로 부여했던 정서적인 가치, ‘추억’이라는 것에 대한 애착은 정말 상당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날수록 짐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선 옮기는 내가 힘에 부치고, 부피/킬로그램/파운드 당 수화물 체크인 비용과 택배, 보관료로 들어가는 비용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짐을 싸고 풀 때마다 물건들을 버리는 손길이 조금씩 가차없어졌다. 처음엔 책 하나를 붙잡고 한참을 고민하곤 했는데 요즘은 아무 느낌 없이 그리고 때로는 거의 강박적으로 주기적인 물건 정리에 돌입하는 나를 발견한다.
특히 옷과 신발은 언제 어디서 버려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리고 짐을 줄일 때 가장 먼저 줄이게 되는 것들이라 어지간해서는 큰 돈을 주고 사질 않고, 버려야할 때 제일 먼저 버리고 필요할 때 하나씩 상황따라 마련한다(그러고 보면 나같은 사람들이 바로 H&M같은 SPA브랜드가 패스트패션 트렌드로 인한 환경오염을 조장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적이다).
버리고 팔고 남에게 주면서 내 옆에서 떠나 보낸 것들 중에는 내가 정말 가지고 있었어야 할 것들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그랬는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느낀 기분들 중 하나가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버리고 싶지 않다. 버리지 않고 이 것들을 옮길 걱정없이 내 곁에 두고 함께 지낼 수 있는 내 공간을 찾아 정착해서 쉬고 싶다. 적어도 그 공간 안의 것은 아무것도 버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 이거였고, 이게 정말 많이 컸다.
헌데 막상 정말 간만에 내 나라 돌아오니, 내 공간을 가진다는 게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더라. 결국 이 ‘버리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지금 내 짐(중의적인 표현이긴 한데, 짐은 정말 인생에서 ‘짐’인 것 같다, 여러모로)은 출국하면서 신청해둔 짐 보관 서비스를 통해 창고에 들어가 있는 것들과, 지금 내 옆에 있는 수트케이스와 배낭에 든 것이 전부다.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 가족들과 함께 산 집의 내 방에 있던 짐과, 시골 할머니 집에 두었던 짐들은 싹 다 처분한지 오래고(몇 년이 지나 다시 보니 참 소중했던 그 물건들의 대부분은 죄다 정서적인 가치만을 위해 보관되어 있던 것들이었다).
이 세상에서 내 물건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합치면 몇 킬로그램이 되려나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자기가 소유한 물건들이 이 세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면적과 킬로그램수는 각자 어느 정도씩 나오려나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