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 한동안 그냥 휴가 내고 잠수를 타버릴까.

    이런 생각이 잠깐 잠깐 지나갈만큼 정신없었던 지난 한주가 어찌어찌 지나갔다. 능력부족으로 몸만 바쁘니 한번 드러눕기도 하고 이래저래 힘에 부칠 수밖에. 특히 저번주 목요일은 한국 출장 전에 오피스로 출근하는 마지막 날이었는데, 약 2주 가량 못 나올 상황이니만큼 처리해야할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이번 행사에 함께 참가할 호주 참가자들의 비행기표 구매도 완료해야  해서 급한대로 여행사에 진행을 맡겼는데 그게 두고두고 화근이 될 줄이야. 이미 센터쪽 담당자와 비행기편 예약까지는 다 끝낸 상태였고, 확정된 최종 참가자들의 정보만 넘기면 되는데 목요일 오전에 연락을 주기로 한 담당자는 감감무소식, 한참 뒤에 다른 사람이 연락이 와서 하는 말이 담당자가 오늘 휴가란다.

    예약 내용이 제대로 전달이 안 되어 있었는지 처음부터 다시 진행을 하고 견적서를 기다리는데, 몇 번이나 재차 확인을 거쳐서 예약을 해두었는데도 몇 시간이 지나 받은 견적서는 날짜가 잘못 되어 있었다. 다시 전화를 걸고 수정을 요구하니 이번에는 그 몇 시간 동안 티켓 가격이 올라 원래 견적에서 자그만치 천 호주달러가 더 추가되었다. 전체 예산은 벌써 며칠 전에 결제가 끝났는데 미칠 노릇.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이 사람은 안 되겠다 싶어 도로 없던 걸로 다 물리고 다른 상담원을 찾아 어찌어찌 다시 저렴한 티켓을 예약하고, 견적서를 받고, 참가자 정보를 넘기고 결제만 진행되면 끝인데 시계를 보니 오후 네시 오십분, 퇴근 10분 전. 아직 할거리가 산더미인데 내가 이게 싫어서 서울을 떠나 놓고는 여기서도 이러고 있나 싶어서 한숨을 한번 쉬고, 결제를 진행할 수 있는 페이지 링크를 요청했더니 하는 말이 15분만 기다려 달란다.

    나는 결제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5분 거리의 다른 빌딩에서 근무 중인 매니저에게 전화를 해서 5시 5분쯤 여행사쪽에서 결제 링크를 받는대로 포워딩할테니 결제를 진행해달라고 부탁을 했더니 돌아오는 말.

    “나 5시에 퇴근이야.”

    아니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내가 6시에 결제를 진행해달라는 것도 아니고 5시 5분인데,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응, 그런데 이거 결제 링크가 30분만 유효해서 그러는데, 5분만 더 있다가 마저 결제 완료해줄 순 없을까?”

    “나 이제 곧 퇴근해야 되고, 5분 기다려서 버스를 놓치면 난 15분 뒤 다음 버스를 타야 돼. 집에 도착해서 가족들과 저녁먹고 7시 이후에는 결제 진행해줄 수 있으니 그 때 연락해.”

    전화를 끊고 가만히 모니터를 보면서 내가 이 사람한테 뭐 밉보인 거라도 있나 잠시 생각해보았다. 프랑스 출신인 이 매니저와는 같이 타향살이의 이모저모를 나누는 나름 가까운 사이다. 아니 5분인데, 그 5분을 못 기다려줘서 결제시한을 넘긴단 말인가? 별 수 없이 일단 결제링크를 받는대로 금액을 최종확인한 후 결제시한을 늘려달라고 전화를 해야겠다, 하고 시계를 보니 5시 5분. 보내주겠다던 결제 페이지 링크는 오지 않았고, 결국 5시 40분쯤이 되어서야 전산 상 문제가 있어 시간이 좀 더 걸렸다는 메일과 함께 링크를 받을 수 있었다. 만약 매니저가 내 부탁대로 지금까지 계속 사무실에 남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일할 때 있었던 일 하나가 떠올랐다. 디렉터가 한국으로 출장을 갔을 때 한번 내게 급하게 자료 요청을 해온 적이 있었는데, 시차 때문에 늦은 밤 시간에 한 시간 반 정도 문서 작업을 해서 메일을 보냈었다. 그 때 디렉터는 30분 단위로 끊어서 내가 시간 외 수당을 청구하도록 지시했고, 난 뭘 이렇게까지? 싶어서 어리둥절해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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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이스북 페이지 ‘하루 5분 마케팅 공부’의 포스팅 http://goo.gl/Z7P7TB

    결국 임금을 받는 기준 중 하나는 일 평균 8시간 주 5일이라는 노동시간이고, 자본론에서는 (실제로 현실에 적용되는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고 이 공식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도 많다고는 하지만) 노동시간 중 상품을 만들기 위한 필요 시간을 제외한 잉여 시간이 자본가의 부를 극대화하기 위해 쓰인다고 한다. 난 사용자도 아닌 같은 고용인의 입장에서 30분이 될지, 1시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매니저의 삶에서 일정 부분의 기회 비용을 아무런 대가없이 빼앗으려는 시도를 했단 얘기다. 매니저의 입장에서는 7시 이후에 시간이 났을 때 결제를 진행해 준 것만해도 충분히 내게 호의를 베푼 셈이었다.

    자기만 제 때 퇴근 못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남아서 지금까지 이러고 있는데, 그거 버튼 몇 번 클릭하는 게 뭐가 어렵다고, 많이 기다려 달라는 것도 아닌데, 지금 바로 처리 안 하면 더 번거로워지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정이 없나, 왜 이리 이기적인가.

    이렇게 생각했던 걸 보면 역시 나도 한국에서 태어나서 20년 가까이를 그 곳에서 보낸 토박이 한국인인가 보다.
    의무감, 사명감, 보람 등으로 열심히 뛰던 사람들이 결국 쏟아지는 업무에의 매몰, 자기 시간의 부재, 정신적&육체적 피로 등으로 초죽음이 되어 도중에 나가 떨어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봐도 이건 개인에게나 조직에게나 피차 서로 손해가 아닌가 싶다.

    그뿐일까. 뭐가 그리 깝깝한가, 융통성있게 일처리 좀 하면 서로 좋은 게 좋은거 아닌가, 노동법? 법대로 어떻게 사나, 이익을 내려면 인건비부터 줄여야지, (자질은 아랑곳없이) 아는 사람 좀 챙겨주는게 뭐 어때, 서류 까짓거 대강 꾸며서 만들면 되지, 회사가 잘 되면 너도 좋은 거지, 네가 한번 사업해봐라, 다 그렇고 그런거지, 뭐 이런 당장은 사소해보일지 모르는 원리 원칙에서 벗어난 일들이 우리 삶에선 참 공공연히 많이도 일어나고, 이런 것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차곡차곡 쌓이고 쌓여 한번씩 그 임계치를 넘었을 때 뻥뻥 터지는 일들, 각종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들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원리원칙’을 지키는 것, 이미 다 있는 법을 지키는 것, 그게 아직까지는 그렇게나 참 어려운 일인가 보다.

    서울.
    서울.

    정신 없었지만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짧은 시간 내에 준비도 잘 끝낼 수 있었고, 좋은 팀들과 함께 하게 되었고, 그렇게 한국으로 출장 온지 오늘로 세번째 밤. 돌아가는 길에는 고마운 매니저에게 줄 선물 하나 사들고 가야겠다.

     

    다큐멘터리 만듭니다. OPEN SHUTTERS, One Way Ticket, Feminism Reboot 감독. '디지털 노마드,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갈 자유' (남해의봄날 출판) 저자. 프로필&컨택 *본 블로그 상 모든 콘텐츠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합니다. 다큐멘터리 관련 사진 및 영상은 모든 저작권이 제게 있으며 이 역시 사전동의 없는 인용 및 2차 가공 금지합니다.

    1 Comment

    1. 한국회사에서 일하는 중인데 공감 깊이 하고 갑니다. 다른 사람의 시간을 너무 당연하게 빼앗는 회사가 너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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