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가 되면서 달라진 점.
내 경우는 한 도시에 오래 머무르는 시간을 가져보고 있다는 것 이외에, 하루를 구성하는 요소 그러니까 시간 사용처가 단촐하게 정리 및 집중되었다는 걸 들 수 있다. 일하고 먹고 자는 필수 활동 이외의 남는 시간은 대개 읽고 쓰며 운동한다.
내가 뭘 정말 좋아하고 뭘 했을 때 행복해지는지, 무엇이 내 유한한 시간을 소모할 만큼 적어도 나 스스로에게는 가치가 있는지를 탐색하느라 이것저것 바쁘게 종종걸음치며 이것저것 온갖 것을 다 해봤던 게 20대라면, 지금은 그 과정을 통해 알게 된 것들을 간추려 밀도 있게 일상을 채우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40대에는 또 어떨까. 40대에도 운동이 지금처럼 내 삶에서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으로 함께 하길 바라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운동 이야기를 기록해보려 한다.
집 앞에 나갔다가 어쩌다 보니 폴 시작
꾸준히 지속해서 하는 취미나 여가 활동이 뭐냐고 하면 현재는 운동 말고는 따로 답할만한 게 없다. 그중에서도 최소 절반 이상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게 폴이다. 많이들 ‘폴댄스’로 알고 있을 그 폴 맞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운동의 형태에 좀 더 정확하게 들어맞는 명칭인 ‘폴스포츠’로 주로 지칭하는데, 이 용어 간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해 볼 것이다. 우선 여기서는 맥락에 따라 폴/폴스포츠/폴댄스를 함께 사용한다.
2020년 1월. 당시 작업 중이던 불법촬영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촬영이 막 끝났고, 남은 겨울을 어디서 보낼지 생각하며 비행기표를 알아보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한국에서 첫 코로나 확진자가 발생했다. 살벌한 타이틀로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하고 이건 뭔가 정말 큰 일이다 싶은 기류가 삽시간에 형성되었다. 좀 상황을 봐야겠는데 시간은 뜨고, 운동을 해볼까 싶었다. 허리디스크 재활로 받아오던 PT가 막 끝난 참이었고 헬스도 좋지만 좀 더 스포츠, 레저, 수련의 영역에 가까운 다른 운동이 궁금했다. 우연한 기회에 뵙게 된 변상욱 대기자님이 60세가 넘은 나이에도 꾸준히 몇십 년째 검도를 수련 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진짜 멋지다고 생각했기에, 이왕이면 그렇게 오래오래 나와 함께 갈 수 있는 운동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잠깐 집 앞에 나갔다가 새로 생긴 상가 건물 앞에 ‘폴댄스 무료 체험’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는 걸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왜 그걸 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체험 신청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마 그 입간판에 써진 게 ‘유도 체험’이나 ‘아크로바틱 서커스 체험’이었어도 신청했을 것 같은 걸 보면 당시에 뭔가 정말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그리고 지금 아크로바틱은 언젠가 꼭 배워보고 싶은 종목으로 리스트에 올라와 있다). 인스타그램 이런 걸 그때는 특히 더 안 하던 때라서 사람들이 하는 걸 본 적도 없고, 아는 것도 들은 것도 없어서 머리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나 사전 지식 같은 게 전혀 없었다.
최대한 짧은 상의와 바지를 입고 오라 하셔서 집에 있는 러닝 팬츠를 챙겨서 예약한 체험 시간에 맞춰 방문했다. 한겨울에 추워 죽겠는데 왜 이러나 싶었는데 직접 해보면서 체감했다. 폴에 피부가 닿을 때의 마찰력으로 폴에서 떨어지지 않고 버티는 거라 살기 위해서는 필수적이었다. 체험 수업이 끝나고 나서 어떻게 알고 왔냐고 물어보시기에 그냥 지나가다가 입간판 보고 왔다 하니 혹시 폴댄스 아냐, 누구누구 가수가 한 걸 보고 오신 거냐 하는데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니 신기해 하셨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마마무의 솔라가 폴을 배워서 그걸 보고 오는 사람이 한창 많을 때였다.
그날 체험 수업에서 배운 동작은 동영상으로 내 핸드폰에 남아 있는데, 폴을 잡고 팔만으로 그냥 매달려 버티는 거였다. 그냥 보면 별거 아닌데 그때는 내 몸무게를 내 팔로 오롯이 버티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태어나서 처음 깨달았고, 그 날 이후 며칠 동안 근육통으로 끙끙거렸다. 양 팔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수업에 등록했다. ‘이게 이렇게까지 힘들 수 있다고?’라는 신기한 마음과, 과장 살짝 보태서 집에서 넘어지면 바로 코 닿는 거리에 있는 폴 스튜디오가 추운 겨울 외출을 질색하던 내게 상당히 매력적인 선택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배우게 된 폴은 내게 관문별로 넘어야만 하는 가지각색의 과제와 고민거리를 던지기 시작했다.
*같은 영화를 봐도 사람마다 평이 가지각색이듯, 내가 폴을 하면서 생각하고 느낀 점들 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되므로 폴을 즐기는 다른 많은 이들 및 관련 커뮤니티와는 다른 의견이 상당 부분 있을 수 있음.
입문: 고통 견디기
1시간여의 수업은 15-20분의 준비운동 및 체력단련으로 시작된다. 고장난 허리를 고치느라 PT를 그나마 상당 기간 받고 가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웜업 과정부터 두 손 두 발 다 들었을 것이다. 내 몸으로 중량을 치려면 당연히 근력이 필수적이고, 기술을 성공하고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유연성도 함께 길러야만 한다. 근력이나 유연성 증강에 힘 써본 사람은 잘 알 것이다. 이 둘을 함께 잡고 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팔굽혀펴기는 처음에는 힘들었는데(할 때마다 생각한다, 내 몸은 왜 이렇게 무거울까) 시간이 지나니 꽤 버티게 되어서 새삼 신기하고, 처음에는 죽어도 찢어지지 않던 다리도 이제 제법 쭉쭉 잘 찢어져서 작년 처음 발레를 시작했을 때 그 덕을 톡톡히 봤다. 다른 건 몰라도 코어, 기립근, 어깨, 광배, 전완, 그리고 유연성(써놓고 보니 많네….)은 폴 시작 전과 후로 완전히 나뉜다.
다시 수업 이야기로 돌아와서, 팔이 어느 정도 펌핑이 되고 힘이 좀 들어가고 나면 수업 진도를 나가는데 일반적으로 그날 그날의 기술을 정해놓고 도장 깨기를 하는 식이다. 처음에는 힘이 달리니 폴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맨살의 마찰력으로만 버티며 아등바등 매달리기 때문에 멍이 많이 들게 된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생기기 전까지는 손바닥 살이 많이 까지고 굳은살이 막 생기기 시작할 때는 굳은 살을 따라 작게 살점이 뭉텅 들리기도 한다. 온몸은 멍투성이고 쇳덩어리인 폴에 밀리고 까진 피부는 따갑기 그지없는데 근육통까지 끈질기게 따라다녀서 처음에는 진통제와 근육이완제를 먹어가며 했다.
시작했을 때, 그리고 입문에서 초급, 초급에서 중급 이런 식으로 반 레벨업을 한 초기에는 그날 그 수업에서 배운 기술을 성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러니 똑같이 멍들고 똑같이 아픈데 기술 성공 못한 날은 얼마나 억울하겠나. 장담하건데 아픔을 잘 참고 신체적 고통이 동반되는 나 자신과의 싸움도 즐기는 사람이라면 각종 격투기류 아니면 폴스포츠를 강력하게 추천한다.
오기로 버티면 버틸수록 슬슬 덜 아프고, 시간이 지나면서 힘이 길러지면 맨살의 마찰력에만 기대는게 아니라 스스로 폴에서 떨어지지 않고 버틸 수 있게 되어서 몸에 멍도 안, 아니 덜 들기 시작하고, 기술도 하나둘 척척 성공하기 시작하면서 할 맛이 난다. 물론 그러다가 반 레벨업하면 다시 처음부터 이 과정 다시 시작이다. 발레도 비슷한 걸 보면 기술 수련 위주의 운동 수업은 많이들 이렇지 않을까 싶다.
선생님이나 주변 경험자들과 이야기해 보면 도중에 부상 당할 때가 아니라면(중급 가면서는 부상 사고가 종종 생긴다. 특히 갈비뼈, 아니면 어깨나 발가락) 보통 갓 시작해서 첫 몇 달 가장 아픈 이 기간에 고통을 못 버티고 그만두는 케이스가 많다.
신기한 게 처음에는 죽을 것 같이 아픈 동작도 시간이 지나고 계속하고 또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뎌진다. 아무 느낌이 안 든다. 수업 듣는 사람들끼리 ‘아마 폴과 자주 닿는 부분의 신경세포가 다 죽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이런 말도 우스갯소리로 하는데, 궁금해서 찾아보니 막상 통증 세포는 같은 자극이 반복되어도 역치가 높아지지 않는다고 한다. 보통 신경세포는 똑같은 자극이 반복되면 역치가 높아지기 때문에 같은 신경을 계속 흥분시키기 위해서는 더 강한 자극이 필요하다. 그런데 통증 세포는 이런 생리학의 일반 법칙이 통하지 않아서 자극을 빠르게 반복해도 역치가 높아지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반복된 자극이 합쳐지면서 통각신경의 활성이 증가하고 고통이 오히려 증가한다. 고대부터 고문이 효과적이었던 것도 바로 생명체가 고통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아니 그럼 폴 타는 사람들은 다 뭐야’ 하며 더 찾다가 이런 걸 또 발견했다.
통각과민과는 반대로 통각신경의 문턱값이 높아지면 아픔을 덜 느낀다. 운동을 한 후 몸은 피곤해도 나른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가 바로 운동에 의해 분비되는 호르몬인 엔도르핀이 통각신경의 문턱값을 높이기 때문이다. 운동을 많이 하고 나서 꼬집히면 보통 때보다 덜 아픈 것, 훈련으로 다져진 차력사가 아픔을 덜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다.
다른 일에 집중하거나 전쟁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전쟁 중 다리가 잘린 병사가 병원에 온 뒤에야 아프다고 느끼는 이유는 생명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병원에 오기 전까지 통증을 억눌렀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신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렇다. 답은 엔도르핀과 정신력이었다. 역시 정신은 육체를 지배한다(이 문장을 쓰며 갑자기 혼자 벅차올랐다).
초급: 순서 마킹
폴 스튜디오마다 다르지만 보통 입문이나 취미반을 시작으로, 고통에 굴하지 않고 수업에 계속 나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초급반으로 레벨 업이 이뤄진다. 난이도 상 큰 차이는 없으나 다만 이제 ‘콤보’라는 것이 등장하며 기술 여러 개가 이어지면서 하나의 콤보가 그날의 수업 진도가 된다.
난 진심으로 도저히 이 순서를 외울래야 외울 수가 없었다. 폴 위에 올라가면 내 어느쪽 발이 오른발이고 왼발인지도 모르겠고, 여기서 오른쪽 팔을 올려 잡는 거였는지 왼쪽 팔을 앞에서 뒤로 넣는 건지 뒤에서 앞으로 넣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선생님이 “아니 오른손, 왼손 말고 오른손이에요!”를 열 번씩 말해 주셔봤자 어차피 난 수행할 수가 없다. 당장 폴 위에서 몸이 아프고 힘든데, 위에서 버티고 있는데 온 힘을 집중하고 있는데 거기에 머리까지 써야 하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내 손과 발이 엉켜 헤매는 와중에 다음 순서가 기억이 안 나는데 기억을 되새길 정도의 여유시간 따위 없다. 시간이 지체될수록 힘이 빠지니 당연히 버티지 못하고 땅으로 주르륵 내려오며 백기를 들게 된다.
한 번 내려오면 바로 다시 올라갈 수 없고, 힘이 좀 돌아오고 회복될 때까지 몇 분은 오도카니 앉아서 쉬어야 하므로 쉬면서 재차 순서를 복기한다. 힘이 빠진 상태에서 올라가봤자 어차피 얼마 못 버티고 내려오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숨 좀 돌리고 다시 올라가면 또 머리는 백지가 된다. 그러길 골백번 하다 보면 드디어 왼쪽 오른쪽이 머리에서 사라지고 몸이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여기서는 다음 동작을 하려면 당연히 아래 손을 떼어야 하고, 여기서는 바깥쪽 다리를 걸겠구나, 하는 식이다. 물론 이것도 다음 반으로 레벨업하거나 콤보가 복잡해지면 다시 처음부터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
보통 방송댄스, 발레, 현대무용 등 코레오 마킹을 해본 사람, 마킹을 잘 하는 사람이 여기서 두각을 드러낸다. 그런고로 나는 지금도 발레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센터 순서를 거듭 영상 돌려보며 미리 외우고 가고, 이런 순서 마킹이 필요한 운동, 특히 안무가 들어가는 춤 종류는 더는 배울 생각이 없다. 발레로 이미 충분히 깨달았고 또 고통받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중급으로 올라가면서 내게 던져진 과제와 고민거리들,
- 내가 좋아하는 것 찾기 (난 도저히 소위 ‘여리여리예쁨예쁨’ 한 건 근처에 못 가겠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을 때쯤 고정폴에 꽂히게 됨)
- 폴댄스를 둘러싼 사회적 낙인과 내적 갈등
- 2번과 같은 결의, 폴 커뮤니티 내부에 자리한 갈등 (대표적으로 #notastripper VS #yesastripper 사이의 대립) 등
정도에 대해 기록해 보려 한다.
마무리는 조회수 4백만이 훌쩍 넘는 2018 PSO U.S. National Pole Champion “Ashley Fox”의 대회 영상이다. 영상 시작 후 첫 15초 가량의 인트로 파트가 가히 충격적인데, 이 댓글의 작성자도 나와 똑같이 느꼈나 보다.
Gravity: “am I a joke to you?”
>> 다음글: ‘[폴 이야기②] 이걸 왜 하냐고 물으신다면’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