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매거진 그라치아 코리아 65호 기고 칼럼입니다. 지면 관계상 생략된 부분과 함께 정리했습니다.
아침 일곱시부터 도시는 통근길에 나선 직장인들로 붐빈다. 만원버스나 지옥철은 이미 일상이 된지 오래. 아침은 거르거나 대강 지하철 역에서 해결한다. 다이어트에든 건강 관리에든 삼시 세끼 신경써서 제대로 된 식단을 챙겨 먹는 게 필수라는 건 잘 알지만, 직장인에게는 사치일 뿐이다.
파김치가 된 채로 사무실에 도착한다. 겨우 집중해서 업무를 보려는데 갑자기 내 자리로 와서 이것 저것 사소한 일을 묻기 시작하는 동료는 참 눈치도 없다. 엄동설한도 아닌데 난방기를 펑펑 틀어 놓은 덕에 목은 아프고 책상 위에 일치감치 올려 놓은 간이 가습기는 도무지 제 몫을 하지 못한다.
퇴근 시간은 일치감치 지났는데 오늘도 부장님은 사무실을 떠날 줄 모른다. 해야 할 업무는 끝낸지 오래지만 선뜻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다. 어차피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어야 하는 거라면, 아예 일처리를 좀 천천히 할 걸 싶다. 그나마 오늘은 갑자기 회식이 결정되거나 하진 않았다.
하루 업무가 끝나고, 다시 버스에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저녁이 있는 삶 따위 남의 얘기다. 회사 바로 앞에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가격이 만만치가 않다. 하루에 출퇴근에만 들어가는 시간 역시 상당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없다. 다들 이렇게 일을 하며 사는 걸.
왜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기 위해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모여야 하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내가 가고 싶고, 살고 싶은 곳은 휴가철에나 맛볼 수 있다는 사실에 한숨을 내쉬어 본 적이 있다면? 과연 이 것이 우리가 일을 하고 살아가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인지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다면?
환영한다. 당신은 디지털 노마드의 길을 선택한 많은 직장인들, 프리랜서, 자영업자, 그리고 원격근무를 시행하는 많은 회사의 경영진들과 정확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의 시작은 정보 기술의 발달과 이로 인한 ‘재택 근무’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2013년 ‘플렉스+스트래티지’ 그룹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에서 풀타임으로 일하는 사람들 중 31퍼센트가 사무실이 아닌 곳에서 대부분의 업무를 처리한다.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거라면, 반드시 한 도시에서 인생의 전부를 보낼 필요가 없잖아?”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사람들이 방콕으로, 프라하로, 발리로 하나 둘 떠나 디지털 노마드가 됐다.
디지털 노마드는 어떻게 여행을 하며 살아갈까
원격근무를 시행하는 회사에서 프로덕트 매니저로 일하고 있는 가상의 인물, A를 예로 들어 보자. A는 지금 베를린에서 세달째 머무르고 있다. 대한민국 여권은 전세계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여행하기 좋은 여권이다. 140여 개가 넘는 국가에 별다른 비자 없이 대부분 3개월, 때로는 6개월 이상도 체류가 가능하기 때문에, 느린 이동을 선호하는 디지털 노마드들에게 최적이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반드시 이용해야 하는 특권인 셈.
곧 날씨가 추워진다. 겨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다 수트케이스 하나로 살고 있는 A에겐 겨울옷이 가장 거추장스러운 짐이다. 디지털 노마드들이 살기 좋은 도시들을 순위별로 나열하고 물가와 인터넷 속도까지 각종 정보를 제공하는 ‘노마드 리스트’(nomadlist.com)에서 다음 목적지를 찾아보다, 날씨와 저렴한 물가에 끌려 인도네시아 발리로 마음을 정했다.
발리에 도착해서는 ‘에어비앤비’(airbnb.com)를 통해 미리 예약해 둔 빌라에 짐을 푼다. 수영장이 딸린 빌라가 서울에서 지냈던 월세집보다도 저렴하다. 한국의 몇 백, 몇 천만원씩 하는 보증금 제도가 다른 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자금 운용에 큰 도움이 된다.
숙소를 나서자 마자 가장 먼저 현지 심카드를 사러 나섰다. 와이파이가 없는 곳에서도 이메일을 확인하고,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연락을 하기 위해서 현지 심카드는 새로운 도시에서 가장 먼저 구입해야 하는 필수품이다. 어떤 통신사가 가장 좋은 요금제를 가지고 있는지는 이미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온라인 커뮤니티인 ‘노마드포럼’(nomadforum.io)과 ‘디지털 노마드 서브레딧’ (reddit.com/r/digitalnomad) 등을 통해 이미 숙지한지 오래.
팀 회의는 스카이프나 구글 행아웃을 이용한 비디오 콜로 진행한다. 실시간 협업 툴인 슬랙(slack.com)은 프로젝트 진행 상황 공유 등을 위해 이용한다. 전세계 각지에 퍼져 있는 팀원들과의 미팅 약속 전에는 월드타임버디(worldtimebuddy.com)를 이용해 서로 간 시차를 확인한다.
처음 며칠을 숙소와 근처 카페에서 일을 하다 발리에는 어떤 협업 공간이 있는지 ‘쉐어데스크'(sharedesk.net)에서 찾아본다. 어지간한 도시에서는 누구나 자유롭게 일하고 사무실로 활용할 수 있는 열린 공간, 일종의 간이 공동 사무실을 제공하는 협업 공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역에 관계없이 가장 안정적으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얼마 전 관련 기사를 읽었던 발리의 대표적인 협업 공간 ‘후붓’에 들렀다.(관련글: 후붓, 신들의 섬에 자리한 협업 공간 이야기) 대나무로 지어진 건물 마당에서는 원숭이들이 장난을 치고 있다. 그 날 하루 업무를 마치고 후붓에서 여는 저녁 모임을 통해 이 곳을 찾은 다른 디지털 노마드들을 만났다. 주말에 다 같이 서핑을 하러 간다기에 얼른 연락처를 주고 받았다. 다음주부터는 아침 저녁 시간을 이용해 틈틈히 요가와 인도네시아 전통 요리 강좌를 들을 예정이다.
30여 명의 디지털 노마드들이 함께 여행하고 일하는 프로젝트인 ‘해커 파라다이스'(hackerparadise.org)를 통해 지난해 코스타리카에서 만났던 친구가 마침 발리로 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 친구가 지금 컨설팅을 하고 있는 회사에서 새로 사람을 뽑고 있다고 하는데, 마침 눈여겨 보고 있던 곳이라 친구를 만나는대로 이야기를 좀 더 들어봐야 할 것 같다.
날씨가 따뜻해지는대로 어서 제주도로 갈 날이 기다려진다. 그리웠던 한국 음식들도 맘껏 먹고, 한동안 오래 머무르며 그간 못 봤던 친구들도 다 같이 한 자리에 모일 예정이다.
점점 더 많은 디지털 노마드들이 세계를 누비는 이유
디지털 노마드는 꿈같은 삶을 즐기는 몇몇 운이 좋은 프리랜서나 자영업자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많은 기업들이 업무 공간에 들어가는 비용을 줄이고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원격 근무를 시행하고 있다. 거기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질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면서, 고용주 입장에서는 원격근무를 그 어떤 복지 혜택보다도 강력한 협상 카드로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아이가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원격 근무는 회사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이기도 하다. (관련글: 원격근무는 꿈같은 얘기? 이들 기업을 보라)
스탠포드대 연구 결과는 또 어떤가. 원격근무자들의 생산성이 13퍼센트 가량 높단다. 2013년 갤럽의 조사결과에서는 직원들의 행복지수와 생산성이 정비례 한다는 결과도 나온 바 있다.
거기다 그간 무섭도록 발전한 정보 기술은 바로 이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노마드로서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한 일등 공신이다. 어차피 같은 사무실 안에 앉아 있는 동료와도 메신저와 이메일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지 않은가?
태어나고 자란 곳에서 일을 하며 삶의 대부분을 한 곳에서 보내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우리는 또 다른 선택지들이 펼쳐진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디지털 노마디즘은 정보 기술의 발달 등을 통해 가능해진, 우리가 고려해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삶의 방식들 중 하나이다.
하루 하루가 마치 일년을 기다려 온 여름 휴가 같을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환상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 수 있는 자유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때로는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지켜나가기 위해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해야 하기도 하고, 시차가 다른 곳의 동료들과 일하기 위해 낮밤을 바꾸는 일도 허다하며, 낮선 곳에서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감내해야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유가 탐난다면? 무작정 프리랜서로 변신하거나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스타트업을 시작하거나 하진 말자. 다른 삶의 방식에 도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변화다. 우선 원격근무를 시행하는 기업 목록을 구글에서 검색해보자. 대부분이 외국 기업이지만 국내에서도 간간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리모티브'(remotive.io)나 ‘리모트OK’ (remoteok.io)에 매일 올라오는 구인 공고를 확인하는 것도 좋다. 프리랜서라면 클라이언트와, 직장인이라면 업종과 회사 분위기에 따라 회사와 천천히 협상을 진행해보는 것도 승산이 있을지 모른다.
개발자나 디자이너라면 전체 지원자 중 단 3퍼센트만 최종 합격한다는 프리미엄 프리랜싱 플랫폼, ‘톱탤'(toptal.com)에 지원해보는 것도 좋겠다. 지원 한다고 딱히 잃을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합격만 하면 전세계의 유수의 클라이언트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다 100퍼센트 원격근무 역시 보장되니 말이다.
나는 올해 초부터 지금껏 만난 디지털 노마드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다. 디지털 노마디즘의 갈라파고스인 우리나라에 디지털 노마드와 관련한 이야기를 알림으로써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 역시 개인적인 목표 중 하나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궁금하다면? 다큐 웹사이트(https://onewayticket.io)와 개인 블로그(dareyourself.net)에 들러보길. 그럼, 모두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