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이야기②] 이걸 왜 하냐고 물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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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는 거야?

이전 글을 본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아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이 힘든 걸 왜 하는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총천연색 멍 시리즈 사진에 통각신경 이야기 같은 건 잔뜩 써 내려가면서 이걸 왜 하는지는 내게 너무 당연한 거라 언급조차 안 했다. 2020년 1월 첫 수업에 나갔으니 시작한 지는 햇수로 어느덧 5년 차(이지만 겨울에는 추운 게 너무 싫어서 자체 방학을 가지고 촬영과 편집일 몰리는 시즌엔 또 안 나가는지라 중간중간 공백 아주 많은 햇수로만 5년 차)인 그런 요즘, 한 번씩 폴 위에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 특히 무서운 기술을 해야만 할 때 잠시 하던 걸 몇 초 가량 멈추고 생각할 때가 있다. 많이 컸다, 폴 위에서 생각도 할 수 있고.

‘내가 도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내 시간 내 돈 써가며 자발적으로 이런 아프고 힘들고 무서운 걸 하고 있지?’

답은 대개 하나로 귀결된다. 멋있으니까.

이런 것(Bgirl)도 해볼 수 있고 (내가 가장 먼저 꽂힌 기술이다. 아직도 완벽하게는 못하지만….)

어설프게나마 이런 것(Iguana)도 할 수 있게 된다.

사람마다 무엇인가가 ‘멋있다’고 느끼는 포인트는 각양각색으로 다르다. 기질, 성장 환경, 가치관, 취향 등에 따라 천차만별로 나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나도 저렇게 멋있게 해보고 싶다’고 도전하도록, 실행으로 옮기게끔 만드는 포인트는 더더욱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어디서든 마이크만 손에 잡으면 객석을 휘어잡는 누군가의 가창력을 보고 보컬 트레이닝을 받기로 결심하고, 누군가에게는 그 포인트가 식칼을 든 요리사의 현란한 칼질이나 친구가 잔디밭에서 보여준 백덤블링일 수도 있다. 그리고 나한테는 각종 거침없는 폴 기술이 그랬다.

폴 수업을 안 들었더라면 내가 평생 살면서 언제 저런 온갖 것들을 해볼 일이나 있었겠나. 아니, 애초에 내가 내 신체를 사용해서 저런 움직임을 구현할 수 있을 거란 가능성조차 생각 못 하고 살다 이번 생을 마무리했을 거다. 지상에서 3미터 또는 그 이상 높이까지도 내 힘 하나만 믿고 맨몸으로 올라가 볼 일도 없을 것이고 공중에서 거꾸로 매달리거나 몸을 한 바퀴 돌려 바닥에 탕! 하고 착지하는 것 같은 일은 언감생심 아니었을까.

앞에서 멋있다고 느끼는 포인트가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했는데 사람은 대개 자신이 보기에 멋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걸 실제로 직접 시도하진 않는다. 난 김연경 선수를 보며 진심으로 멋있다고 느끼지만 당장 배구를 시작해야지! 같은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그 차이가 뭔가 생각해 봤는데 ‘나도 저건 어쩌면 해볼 수 있을지도 몰라’라는 현실적인 가능성 여부, 그리고 타자에 대한 동경에서 오는 ‘멋있다’의 영역인지 아니면 ‘저건 내가 직접 해내서 내가 그 멋진 대상이 되어야겠다’정도까지 욕심나는 영역인지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다시 폴 이야기로 돌아와서, 폴은 보통 살면서 어지간해서는 직접 접해볼 일이 크게 없는 기계체조, 아크로바틱 영역의 기술을 생각보다 낮은 진입장벽과 함께 접해볼 수 있는 상당히 유용한 창구이다. 나와는 멀게만 느껴지는 전업 체육인의 신체가 아니더라도, 그냥 내 몸으로도 들이는 시간과 노력 대비 해낼 수 있는 것들의 스팩트럼이 넓다.

좌) Inverted Ankle Grip Split, 우) Twisted Grip Handspring Pencil  (onlinepolestudio.com)

거기다 내 경험상 폴 기본기를 익혀놓으면 에어리얼 후프, 핸드스탠드부터 에어리얼 실크(이건 아직 못 해봤다)부터 플라잉 요가까지 충분히 폴에서 그간 배운 걸 적용 및 응용할 수 있다. 공중에서 잡고 버티는 힘, 균형감각, 그리고 유연성(플러스 고통을 견디는 능력 및 담력) 등이 이 계열 운동에서 일맥상통해서 그런 것 같다. 아직 나는 리스트업만 해두고 동경의 영역으로 남겨두고 있는 아크로바틱 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폴 기본기는 필수가 아닐까 싶다.

에어리얼 후프 (dragonflybrand.com)
에어리얼 실크 (flyingfantastic.co.uk)
국내 아크로바틱 전문 교육 시설 <시온 서커스>

 

‘진지한 여가(serious leisure)’라는 개념이 있다. 수동적 여가 활동인 캐주얼 여가(casual leisure)의 반대편에 있는 개념으로, 캐주얼 여가가 그 여가 활동 자체만으로 즉각적인 즐거움을 얻을 수 있으며 추가적인 노력과 훈련 없이도 즐길 수 있는 활동인 반면 진지한 여가는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다.

  • 역경을 통한 목표 달성 (conquering a goal through adversity)
  • 점진적인 성취 (progressive achievement)
  • 특별한 훈련 (special training)
  • 소속감 및 혜택 (belongingness as well as benefits)
  • 독특한 *에토스(특정 집단·사회의 기풍) (unique ethos)
  • 정체성 (identification)

Stebbins, Robert A. 1992. Amateurs, Professionals, and Serious Leisure. Kingston: McGill-Queen’s Press—MQUP.

여섯 가지 항목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내게는 폴이 전형적인 진지한 여가 활동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이걸로 돈을 벌기는커녕 쓰고, 일이 바빠도 최대한 짬을 내어 시간을 할애하고, 안 되는 걸 될 때까지 하다 보면 짜증도 나고 여기저기 몸이 비명을 지르기도 한다. 어디까지나 취미, 여가로 하는 건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나 싶을 수 있으련만 여기서 말하는 ‘진지한 여가 활동’ 하나씩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다 알거라 생각한다. 여기서 얻는 성취감과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보면서 ‘와 멋있다!’하고 탄성을 지른 그 기술을 아무리 느리고 힘들고 또 무서워도 언젠가는 내가 할 수 있을 거란 그 가능성을 알기에, 설렘과 기대감에 그리고 작은 기술이라도 성공한 날에는 그 짜릿함과 쾌감에 오늘도 느리고 서툴지만 하나씩 배우고 연습하고 있다. 

 

중급: 내가 좋아하는 것 찾기

공자 가라사대,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보다 못하다(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乐之者)’ 했다. 많은 경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내가 반드시 잘하는 건 또 아니다. 그러나 다른 건 몰라도 취미의 영역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걸 찾아야 좀 더 오래 또 즐겁게 지속할 수 있고, 지속할수록 내가 그걸 잘할 가능성도 커진다. 그게 나에게는 폴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찾아나가는 과정으로 다가왔다.

집 앞에 나갔다가 얼떨결에 시작하고, 입문-초급반까지는 내가 뭘 좋아하고 말고를 따질 것도 없이 고통과 순서 마킹과 씨름하며 체력과 기본기를 익히기에 급급했다. 그러다 드디어 인버트(아래 사진)를 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중급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인버트는 옆구리살을 폴에 밀착한 상태로(물론 이것도 고수들은 밀착할 필요 없이 팔과 등힘만으로 한다) 폴을 양손으로 잡고 버티며 몸을 그대로 뒤집는 동작으로, 보통 이걸 할 수 있게 되면 초급 졸업! 중급 시작이다 (@janayway)

중급 수업을 들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힘이 붙고, 슬슬 폴 위에서도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다. 폴 시작하고 2년이 다 되어갈 때쯤부터는 인스타그램으로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사람이 천차만별로 다른 스타일로 해내는 기술 영상들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와 이건 멋지다’, ‘음 이건 잘 모르겠어’ 하는 소위 ‘취향’이라는 게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룹 수업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기술 진도가 나갈 때 다른 사람은 찰떡같이 자기 기술로 만들고 잘 수행하는 것들을, 나는 아무리 해도 어색하고 이상하거나 아니면 솔직히 말해 그냥 잘 수행하고 싶은 열의가 덜 생기는 것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배우는 입장이면서 이건 또 뭔 소리냐 싶을 수도 있겠지만 사람마다 호불호가 다 각양각색 아니겠나. 그러니 향수만 해도 수백 가지 종류가 끊임없이 나오고 반팔티 하나도 수천수만 가지 디자인이 출시되고 판매된다. 이건 일도 아니고 재밌으려고 하는 취미다 보니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또 그렇게 된다(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렇게 어쩌다 운 좋게 오전 수업 출석자가 나 혼자일 때, 배우고 싶은 기술을 무려 내가 선생님께 말하는 귀한 기회가 생길 때 내 요청 사항은 대략 “파워풀한 거/멋있는 거/고정폴 기술 중에 제가 할 수 있는 거 혹시 뭐 없을까요?”가 되었다.

 

스핀폴과 고정폴

폴을 배우지 않으면 어지간해서는 알 일이 없는 건데 폴 기술은 크게 스핀과 스테틱(고정)으로 나뉜다. 모든 폴이 다 빙글빙글 돌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일반적으로 폴은 아래쪽에 스핀, 스테틱으로 모드를 바꿀 수 있는 조절 장치가 있다. 조절 방법은 폴 제조사나 모델마다 다른데 아래 사진 같은 모델의 경우 검은색 고무 부분을 잡고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 돌리면 폴을 돌려 회전할 수 있게 되고,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 돌리면 놀이터 철봉처럼 완전히 폴이 고정된다. 폴이 돌고 돌지 않고의 차이는 매우 크고, 이에 따라 스핀폴에서 할 수 있는 기술과 고정폴에서 할 수 있는 기술이 나뉜다.

아래 영상은 2018년 World Pole Championships 남자 부문 1위를 수상한 중국 선수 Ke Hong의 대회 영상이다. 폴스포츠 대회에서는 폴이 저렇게 스테이지에 두 개가 설치되는데, 왼쪽은 스핀폴이고 오른쪽은 고정폴이다. 고정폴 기술은 영상 1분부터(몸이 마치 폴과 함께 회전하는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폴은 가만히 있고 몸이 저 동작을 다 하는 것이다. 1분 17초부터 보면 폴이 고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스핀폴 기술은 3분부터 이어진다(고정폴과 달리 선수가 역동적으로 움직이지 않아도 알아서 폴이 부드럽게 끊기지 않고 회전하는 걸 볼 수 있다).

아래 영상에서는 더 쉽게 그 차이를 볼 수 있다.

(1) 스핀폴

(2) 고정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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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어디서든 스쳐 지나가듯이라도 폴 관련 무언가를 봤다 하면 십중팔구 스핀폴이다. 특히 국내에서 방송이든 유튜브에서든 ‘요정 같은’ 이런 톤의 자막과 함께 나오는 폴 영상을 보았다면 99% 스핀폴이다. 내 경우에는 시간이 갈수록 스핀폴 중에서도 이런 스타일로는 하기가 힘들, 아니 그냥 내 블로그니까 솔직하게 말하겠다. 하기가 싫어졌다…. 즐겁지가 않았다.

이런 스타일의 폴링에서 기술 수행은 당연한 거니 제외하고, 그 이외에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거칠게 축약했을 때 “예쁘게”(많이 고민했으나 이 단어를 대체할 만한 더 올바르거나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기술을 수행하는 것인데 이건 내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하고 또 거부감이 드는 부분이었다. 디렉션에서 ‘예쁘게’나 ‘여리여리하게’같은 단어가 나와버리면 순식간에 의욕이 사라져 버렸다(이건 결국 이번 편에서 분량 조절 실패로 못 다룰 내가 가진 몇 가지 고민점과도 관련 있는데 이 부분은 다음 글에서 풀겠다). 허리디스크 때문에 재활 PT를 받던 때에도 많이 생각했던 지점인데, 무조건 ‘마르고 예쁘게’, 그리고 ‘사회에서 요구하는 여성성’에 들어맞는 몸을 목표로 들이미는 헬스장이나 트레이너는 최대한 피했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고정폴 수업을 듣게 되었고, ‘아 이거구나’ 싶어졌다. 짧고 굵고 역동적인데 멋지기까지 하다! 고정폴은 아무래도 까다롭고(보통 중급 레벨부터 배울 수 있게 된다), 그날 배운 기술을 당일 성공하기 어려울 때가 많아 수업 진도 중에 나가기도 애매하다 보니 일반적으로 스핀폴 대비 비중을 적게 가져간다. 해서 스튜디오 중에는 회원들이 고정폴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고정폴 수업은 가뭄에 콩 나듯 진도에 포함되는 곳도 많다. 기술 성공이 어려워 성취감을 느끼기가 어렵다는 게 큰 이유다. 그렇다 보니 고정폴은 아예 따로 떼어서 드물게 스테틱 전문 과정이나 특강이 별도로 있기도 한데, 열심히 더 힘 키우고 몸 만들고 성장해서 꼭 들어보려고 벼르고 있다.

또 내게 고정폴이 매력적인 포인트 하나가, 고정폴 기술은 옷을 입어도 심지어 평상복을 입은 채로도 할 수 있는 기술들이 꽤 있다. 물론 맨살 면적이 줄어들면 폴과의 컨택 부위도 줄어드는 만큼 마찰 없이 나 혼자서 다 버텨야 하니 난이도는 수직 상승한다. 추운 겨울날에는 스튜디오 도착해서 옷 벗는 게 정말 고역인데 그럴 필요도 없고, 기술에 따라 긴 바지를 입을 수도 있으며 야외에서 놀이터 철봉 같은 걸 붙잡고 할 수도 있다!

( ↓ 이런 고정폴 특강 들어보기가 내 위시리스트에 올라가 있다)

혹시라도 모를 오해 방지 차원에서, 스핀폴은 고정폴보다 ‘쉬운’ 게 아니라 ‘다른’ 기술이다. 폴스포츠 대회에서도 선수는 제한된 시연 시간 안에 스핀폴과 고정폴 모두를 사용해야 한다는 대회 규정이 있다. 내 기준 스핀폴은 폭발적으로 짧은 시간에 힘을 쓰는 고정폴에 비해 훨씬 더 많은 지구력을 요구한다. 고정폴 수업만 골라 듣다가 간만에 스핀폴 수업에 들어가면 아직 기술도 안 들어갔는데 폴 잡고 오르기만 해도 벌써 힘에 부친다. 헉헉거리는 나를 보며 선생님은 말씀하신다. “스핀을 요즘 안 하셔서 그래요.”

또 스핀폴이라고 내가 위에서 서술한 요정 같은 스타일만 있는 것도 전혀 아니다. 퍼스널 트레이너분들만 해도 티칭 스타일 같은 것들이 모두 각양각색 아닌가. 해외 원정 수업 간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나라마다 또 다르고 국내에서도 스튜디오마다 다르고, 심지어 한 스튜디오 안에서도 강사별로 스타일이 각양각색이다. 국내 모처에서 폴을 시작한 한 친구는 선생님이 유독 기술의 완성도가 아니라 손가락 모양을 우아하고 예쁘게(…) 만드는 것 같은 디테일에 수업 시간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는 등 스타일이 맞지 않아 결국 다른 스튜디오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새로운 스튜디오에서 수업을 듣게 되었을 때는 미리 선생님별 스타일을 원장 선생님께 문의한다. 서로 스타일이 맞지 않으면 나도 나지만 버벅거리며 열의 없이 주춤거리는 나를 보는 선생님도 힘들 것이므로.

2023년. 스튜디오 ‘연인사’의 운동인 아카이빙 프로젝트 <On Your Mark> 촬영본 (@yeoninsa_onyourmark)

 

>> 다음글: ‘[폴 이야기③] 여자가 운동할 때 (feat. 에스테틱 스포츠)’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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