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촬영범죄 다큐 작업기(1) 태국에서 받은 한 통의 전화

 

2018일 7월 25일

나는 당시 태국 차암의 한 레지던스 아파트에 머무르며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석 달이 멀다 하고 도시를 옮겨 다니던 걸 이전 다큐멘터리 작업의 마무리와 함께 조금씩 연착륙시키던 참이었다. 2017년 한국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봄과 가을에는 한국에 머무르되 한여름과 한겨울에는 피서와 피한을 목적으로 나와 있는 생활을 했다. 원격근무를 허용하는 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기에 수월하게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이었다. 

왜 태국에서도 많고 많은 곳 중에 하필 차암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어지간한 곳은 다 있어 봤고, 어디든 최대한 한적한 곳에서 이것저것 다른 것 신경 안 쓰고 조용히 일하고 읽고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차암은 마찬가지로 작지만 그래도 나름 관광지의 모습을 엇비슷하게 갖춘 후아힌에서도 북쪽으로 30km 정도 떨어진 조용한 해안 마을이다.

요즘은 꽤 다를 듯 싶지만 저 때는 정말 뭐가 없었다. 호텔과 레지던스 형태의 아파트 건물 몇 채가 바다 앞에 황량하게 서 있었고 이렇다 할 식당마저 몇 개 없어서 내 외식 장소는 몇 군데로 고정되어 돌아가며 이뤄졌다. 극도로 단조로운 하루하루였다. 미리 봐두었다가 예약한 레지던스는 훌륭했고, 수영장과 운동 시설도 마음에 쏙 들었기에 어디든 조용하고 날씨 좋은 곳에 콕 박혀 있겠다는 내 소기의 목적은 완벽하게 달성한 셈이었다.

조용하고 한적했던 2018년 여름의 차암

2018년 7월 25일, 그날도 일을 시작하기 전에 아침 일찍 일어나 수영하러 집을 나서던 참이었다. 보통 취침 시간쯤부터 다음날 업무 시작 전까지는 휴대폰을 방해금지 모드로 돌려놓는데, 무심코 보니 간밤에 직장 동료인 지은님(이하 J)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2018년 5월 19일

J와 나는 한 미디어 회사에서 만났다. J는 기사팀에서 일하고 있었고 나는 갓 한국에 들어와서 그곳의 영상팀을 도맡게 된 참이었다. J는 사진과 영상에도 관심이 있었고 실력도 있었기에, 설득과 논의를 거쳐 잠시의 조정 기간 끝에 영상팀에 합류했다. 그 후 우리는 종종 같은 촬영 현장에 함께 나가곤 했다. 

2018년은 잊을 수 없는 해였다. 그 한 해 동안 당시 일하던 회사 건물 바로 앞에서 불법촬영 범죄를 규탄하는 시위가 계속해서 일어났다(총 여섯 차례의 시위 중 8월과 12월을 제외한 나머지 시위가 모두 혜화역 앞에서 진행되었다). 5월 19일 첫 시위는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다. 며칠 전부터 이날 혜화역에서 대규모로 여성들의 시위가 있을 거란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하지만 과연 몇 명이나 모일 것인가? 과연 나가서 취재를 할 만한 거리일까? 당시만 해도 이런 식의 여성 시위가 대대적으로 언론의 이목을 끌만큼의 규모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시위 취재의 경우 대개 단체에서 미리 보낸 취재요청서에 담긴 장소에 시간 맞춰 가서 보도용 자료를 받고, 랩톱을 들고 자리를 잡고 앉아 있다. 그 사이 사이에 카메라가 끼어들어 열심히 발언자들과 십수 명의 사람들의 손에 들린 피켓을 촬영한다. 시위는 그렇게 보통 한 시간 내외로 취재가 끝나는 형식이 주를 이룬다.

이번에 혜화역에서 진행된다는 시위는 주최측도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모든 게 베일에 싸인 건이라 다른 일들을 제쳐두고 촬영 나가기가 더 애매했다. 각자 그 주의 취재 예정 아이템을 보고하는데 팀 내부에서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 와중에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게 이건 뭔가 심상치 않다는 감이 들었다. 뭔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나는 어차피 회사 바로 앞이니 짬을 내어 혼자 촬영을 다녀오겠다고 했다. 

 

2018일 5월 19일 오후 4시

내가 현장에 도착한 건 당일 오후 4시 경이었다. 혜화역 앞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다. 미리 공지된 드레스코드가 빨간색이여서 많은 사람이 빨간색 옷이나 모자 등을 걸치고 바닥에 줄지어 빼곡히 앉아 있었다. 앞에서 자유발언이 이어지는 동안 폴리스라인 쪽에서는 여러 차례 실랑이가 일어났다. 지나가던 남성들이 시위 참가자들을 휴대폰으로 자꾸 촬영하다 보니, 시위 참가자들이 “몰카 반대 시위에 몰카를 찍는 게 말이 됩니까? (당시에는 불법촬영이라는 단어와 함께 ‘몰카’라는 지금은 거의 퇴출당한 단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었다)”하며 경찰관에게 그들을 불러 세우고 촬영본을 지우게 할 것을 거듭 요구했다.

자유발언 등이 모두 끝나고 어느덧 6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긴 직사각형 형태로 도로에 마련된 시위 장소 가장 앞쪽에는 진행자들이 올라가 일종의 무대로 활용한 트럭이 있었는데, 마지막 순서인 사진 촬영 때 기자들이 그 트럭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첫 시위인  5월에는 취재 나온 기자가 몇 명 되지 않았다. 개 중 카메라를 들고 온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한다(그다음 시위인 6월부터는 삼각대 자리싸움에, 서로 앵글에 걸리지 않게 움직여주는 게 힘들 정도로 취재 카메라가 많아졌다).

트럭 위로 올라가 내 눈앞에 길게 늘어선 시위대를 바라보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이거 진짜 큰일이구나, 이거 일이 엄청나게 커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열기가 무서우리만치 뜨거웠다. 그렇게 그 날 그 자리에서 찍은 사진이 나름 온라인 상에서 많이 퍼지기도 하고, 해외 언론에서 제공 요청을 받아 여러 차례 전달하기도 한 아래 사진이다.  

ⓒ 2022. Youjin Do All rights reserved.

그 후로 6월 9일, 7월 7일, 8월 4일, 10월 6일, 그리고 마지막 12월 22일까지 총 여섯 차례에 걸쳐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라는 이름으로 시위가 이어졌다. 그때마다 촬영 허가를 받고 꾸준히 프레스 배지를 달고 시위대 사이에 들어가서 촬영했다. J가 틈날 때마다 함께 했고, 내가 한국에 없던 무더웠던 8월의 시위는 J가 홀로 나가 취재를 하고 왔다.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그대로 몸이 익을 것 같았는데 무수히 많은 참가자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고 전해왔다. 

당시 시위 참가자에 대한 각양각색의 테러 예고글이 온라인상에 떠돌던 터라 사진과 영상 발행 시에 프레임 단위로 돌려보며 블러를 최대한 꼼꼼히 하는 일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기도 했다. 시위를 방해하러 코스튬 의상 같은 걸 입고 본격적으로 촬영하러 오는 남성들이 있었고, 그들과 주최측 그리고 경찰 삼자 간의 실랑이가 매번 있었으며, 시위의 구호가 무색하게도 몰래 시위 참가자들을 촬영하는 남성들이 너무 많았다. 

그 때문인지 당시 주최측은 펜스로 둘러싸인 시위 장소 내부로는 여성만 입장 가능하게 했고, 취재진도 여성으로 한정했다. 한 번은 열심히 촬영하고 있는데 저쪽 맞은편에 지상파 방송사 로고를 단 방송 카메라를 조작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 너무나 낯이 익었다. 다시 살펴보니 알고 지내던 영화 작업자분이셨다. ‘저분이 언제 저 방송사에 취직했었나?’ 하고 얼른 가서 인사를 하고 잠깐 잡담을 하니, 여성 취재진 방침 때문에 급히 외주 촬영자로 섭외가 된 거라 하셨다. 그때 저 방송사의 해당 뉴스 촬영팀에는 내보낼 여성 촬영자가 없기 때문이었다(그리고 이 분은 후에 이 불법촬영범죄 다큐멘터리의 촬영 감독을 맡게 되었다).

시위가 한창 이어지던 중에 주최측도 어렵사리 섭외하여 영상 인터뷰로 담아낼 수 있었다. 신상 보호를 위해 블러를 꼼꼼히 하느라 거듭 체크에 체크를 엄청나게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때에도 J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함께 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이 건에 대해 취재하고 있던 그였다.

 

다시, 2018년 7월 25일 

7월 7일 세 번째 시위까지 촬영하고, 8월 시위 촬영은 J에게 맡겨두고 나는 태국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7월 25일 아침. 부재중 전화를 확인한 후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나는 J에게 전화를 걸었고 그는 어젯밤 본인에게 일어났던 일을 내게 말했다. 간밤에 경찰이 집에 찾아와 건물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집에 있던 자신을 촬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했다고 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본인의 언어로 직접 듣는 게 더 적절할 듯 하여 J가 해당 사건 히스토리를 기록한 트위터 계정으로 남긴다. 

받으실 충격 등을 걱정하여 부모님께 알리기를 주저하는 J에게 어서 부모님에게도 알리고, 경찰서에도 부모님과 동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이미 지금까지 경찰이 보여준 태도가 너무나 어이가 없을 만큼 방관적이고 미온적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젊은 여성이 혼자 경찰서에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가 더욱 염려되었기 때문에 그랬다)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끝났다. 

그 후 남은 여름을 J는 동료들,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보냈다. 연합뉴스의 보도를 시작으로 외신에도 보도가 되었는데 이를 기점으로 경찰의 태도가 눈에 띄게 바뀐 것이 그나마 다행이면서도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사건 발생 시점부터 그랬더라면, 상황이나 대상과 관계없이 애초에 제대로 사건에 임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당시 J와 J를 지켜본 사람들 모두가 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시위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어느 날 J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토대로 내게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이대로 피해자로만 영영 남고 싶지 않다는 것,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나는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그와 나는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동료로 만났지만, 점차 동료뿐만 아니라 소중한 친구로서도 친밀감을 쌓아나가고 있던 참이었다. 아직 재판으로든 다른 어떤 형태로든 이 사건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 회복에 힘써야할 그의 상황을 오히려 나쁘게 만드는 결정이 아닐까 고민스러웠다.

뿐만 아니라 다큐멘터리에 나오게 되면 음성이 변조되고 얼굴이 블러 처리되어 나온 뉴스와는 달리 그의 이름도 얼굴도 모든 게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이게 과연 맞는 건지,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이게 과연 해도 되는 일인건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다. 

내 개인적으로는 2017년 공개한 다큐멘터리 One Way Ticket 이후 준비하고 있던 차기작의 기획안이 어느 정도 완성되어 가는 시점이었고(이건 여러 사정으로 지금도 여전히 내 기획안 폴더에서 잠자고 있다. 해외 단체 몇 곳에서 제작지원금 1차 심사를 통과한 상태인데, 사실 많이 버거운 주제라 언제 풀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또 친구나 회사 동료가 아닌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J를 대하는 것이(끊임없이 질문을 하고, 인터뷰를 하고, 카메라에 담는 일 등) 우리의 관계에 혹 해가 되지는 않을지도 고려해야 했다. 혼자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당시 공황장애 건으로 상담을 받고 있던 상담 선생님께 자문료를 드리고 정식으로 자문을 받으며 조금씩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게 2018년 가을, J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OPEN SHUTTERS 보러 가기 

 

>> ‘불법촬영범죄 다큐 작업기(2) 제작비가 있어야 다큐를 만들지’에서 계속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