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터닷넷 연재글입니다.
‘디지털 노마드.’
인터넷의 발달로 사람들이 어디서나 일을 할 수 있게 된 덕분에 가능해진, 장소의 제약없이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프리랜서나 기업가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회사들이 원격근무를 시행하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선택 가능한 삶의 방식 중 하나가 돼 가고 있다.
아직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여전히 꿈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분명 변화는 일어나고 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일을 시키는 기존 방식이 더는 당연한 것이 아닌 일이 됐다. 특히 기술 기반 회사들은 한 도시나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더 넓은 곳에서 인재를 영입하길 원한다. 원격근무는 자연스런 흐름으로 밀려오고 있다.
이에 힘입어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일하고, 여행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살아가는 ‘디지털 노마드’들이 전세계를 누비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러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는 사람들과 그 뒤에 자리한 사회 현상을 함께 담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번에는 국가 정부 차원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재빨리 간파하고 이에 대응하고 있는 좋은 사례인 에스토니아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누구나 에스토니아인이 될 수 있는 e레지던시 프로그램
에스토니아는 유럽 동북부에 자리한 인구 130만의 작은 나라이다. 알래스카와 같은 위도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 탓에 여름철을 제외하고는 날씨가 매우 추운 곳이기도 하고, 스카이프가 탄생한 나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91년 소련으로부터 독립 후 자체적으로 확립한 전자 정부 시스템으로 유명하며, 전자 투표 및 전자 서명 관련 법률이 제정되어 이미 시행되고 있다. 올해 초부터 시행한 ‘e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다시 한번 주목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모든 에스토니아인은 위와 같이 생긴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주민등록증과 별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이 신분증에는 디지털 인증서가 내장돼 있다. 온라인에서도 이 신분증 하나로 웹사이트 가입, 인터넷뱅킹부터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까지 카드리더와 간단한 로그인 절차만으로 본인 인증을 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이 디지털 인증서를 이용한 온라인 계약 역시 오프라인의 서면상 계약과 동일한 효력을 행사함을 명시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 덕에 에스토니아인은 전세계 어디에 있든 일체의 물리적인 움직임 없이도 모든 종류의 행정 서비스 이용 및 금융 거래가 가능하다.
e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에스토니아 정부가 지난 13년 여에 걸쳐 자국민에게 제공한 이 서비스를 국적에 관계없이 신청하는 사람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보급하는 것이다. 직접 에스토니아를 방문하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50유로의 비용과 함께 신청할 수 있으며, 카드 수령은 각국 에스토니아 대사관에서 하면 된다. 2015년 10월 현재 한국에서는 카드 수령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일본 등 다른 국가에 위치한 대사관을 방문해야 한다.
e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이 신분증을 가진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는 법인 설립, 법인 관리, 세금 신고, 은행 계좌 개설, 은행 거래 그리고 디지털 서명을 이용한 계약 처리 등이다. 이 모든 것들은 100% 온라인만으로 처리 가능하다.
에스토니아 정부의 세금 관련 행정 서비스는 은행 등으로부터 자동으로 정보를 받아오게 돼 있다. 사용자는 별도로 양식을 작성하지 않아도 된다. e레지던시 프로그램 디렉터는 세금 신고 절차에 총 15초도 안 걸리는, 클릭 몇 번으로 끝나는 시연 영상을 인터뷰 중 공개하기도 했다. 세금 신고가 하나의 거대한 연례 행사 격인 다른 나라들 입장에서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이다. 미국 및 기타 국가에서 세금 신고 및 환급 절차를 처리해본 분들이라면 특히 공감할 것이다. ‘액티브X’로 대변되는 웹 장벽과 덕지덕지 따라붙는 인증 프로그램들로 국민적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한국 e세금 시스템도 예외는 아니다.
본인의 디자인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는 인도인 디자이너가 있다고 하자. 이 디자이너는 자신의 디자인 상품을 해외 시장에 판매하기 위해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첫번째 관문으로는 현지의 복잡하고 느리기 짝이 없는데다, 온갖 종이 뭉치가 필요한 행정 절차를 들 수 있다.
두번째는 서비스 공급자의 부재다. 특히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결제 서비스 등 많은 글로벌 서비스들의 이용이 불가능하다.
세번째는 금융이나 법인 등 각종 관련 행정 절차를 위해서 매번 물리적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불편함이다. e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위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 EU국가의 디지털 신분증 소지자로서 획득할 수 있는 판매자로서의 신용도는 덤이다.”– 카스퍼 코리우스, e레지던시 프로그램 디렉터
1천만명의 에스토니아인을 만들자
자국의 서비스를 국적불문하고 아무에게나 제공하겠다니, 언뜻 생각하면 꽤나 엉뚱하면서도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e레지던시 프로그램의 배경을 살펴보면 오히려 에스토니아 정부로서는 이것이 필연적인 행보임을 이해할 수 있다.
에스토니아는 20여년 전까지 구 소련(러시아) 통치 하에 있었다. 1991년 독립 당시 에스토니아는 정부 근간을 이루는 모든 시스템을 완전히 처음부터 구축해야 했다. 그 덕분에 당시 이미 보급돼 있던 인터넷을 이용해 모든 행정 시스템을 디지털화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로 치면 주민센터에 해당하는 관공서를 짓는 데 들어갈 자원 역시 모두 이곳에 투자했다.
게다가 에스토니아는 자국민 상당수가 에스토니아가 아닌 곳에서 살고 있다. 정부의 공식 발표는 10만명으로 추산하지만, 실제 해외에 거주하는 에스토니아인의 수는 이의 2배에 이르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스카이프 마피아’로 불리는 스카이프 초창기 직원과 임직원들 역시 상당수 실리콘밸리에 거주 중이다. 에스토니아 정부로서는 이들로부터 세금을 걷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온라인만으로 간단히 처리할 수 있는 세금 납부 등의 행정 서비스가 필수였다.
에스토니아는 출산률도 가구당 1.55명으로 그리 높지 않고, 국토가 넓은 것도 아니고, 이민자가 많은 것도 아니고, 서유럽처럼 부유한 나라도 아니다. 그러니 e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전면 개방은 어찌보면 예정된 수순이었던 셈이다.
2015년 2월 프로그램을 띄울 당시 에스토니아 정부는 스타트업처럼 움직였다. 거창하고 복잡한 기획서와 지난한 결제 과정 대신, 세부 계획 없이 우선 간단한 웹사이트부터 공개한 뒤 해당 프로그램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의사를 물었다. 하루가 채 안 돼 100여곳 나라에서 4천여명이 향후 관련 업데이트를 받기 위해 웹사이트에 자신의 e메일을 등록했다.
이를 시작으로 엔지니어 출신이자 경제부 사무총장 및 에스토니아 정부 CIO인 타비 코카가 ‘1천만명의 에스토니아인을 만들자’라는 목표와 함께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했다. 타비 코카는 정부 플랫폼 관련 스타트업을 운영하고 있던 27세의 카스퍼 코리우스를 프로그램 디렉터로 즉시 영입했다.
35세의 젊은 수상을 둔 에스토니아 행정부는 특히 정보기술(IT) 관련 분야의 공무원들이 상당부분 스타트업 종사자 출신 및 현직 엔지니어들로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인재 유치를 위한 국가간 경쟁
정부 CIO 타비 코카는 미디어 인터뷰에서 이를 “국가간의 끊임없는 전쟁”이라고 표현했다. 해외 투자, 기업 및 인재 유치, 그리고 세수 확대를 위한 전쟁 말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던 이전 세대와는 달리, 이제는 IT 발달과 원격근무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물리적으로 한 곳에 반드시 머물러야만 하는 이유가 차츰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태어난 곳이 곧 필연적으로 자신의 평생 거주지가 됐던 시대가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스페인, 칠레, 독일 등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 기업가와 프리랜서, 스타트업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각종 비자 우대 정책 역시 같은 흐름에서 볼 수 있다. 인터뷰 당일도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 자리잡은 e에스토니아 전시관은 이곳을 찾은 해외 정부 관계자들과 미디어 관계자들로 붐볐다.
“물리적인 국경에 관계없이 정부 역시 사용자가 취사선택 가능한 하나의 플랫폼이자 상품이 됐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여러 정부가 이와 같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서로 경쟁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 타비 코카 에스토니아 정부 CIO
그럼 한국은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20대 대부분을 해외에서 보내는 동안 이제껏 내가 부딪혀야 했던 각종 곤란했던 상황들은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다. 한국 휴대폰 번호 없이는 본인 인증이나 서비스 이용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해둔 웹사이트들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아이핀이니 마이핀이니 하는 것까지 들어가면 정말 따로 책을 하나 써도 부족할 정도다. 각종 행정 웹사이트들의 영문 페이지는 보기가 민망할 정도다. 글로벌 인재, IT 강국을 외치면서도 관련 시스템은 미비하기 짝이 없다.
관계 부서의 의사결정권자들이 과연 IT 분야에 대해 조금이라도 실제 경력이 있다면, 국제 동향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애초에 공인인증서, 액티브X, 샵메일 같은 각종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싶다.
금융 행정도 마찬가지다. 인출 한도 변경이나 카드 재발급 등의 일처리는 대부분 해외에서 불가능한데다, 어쩌다 방법이 있다고 해도 번거롭기 짝이 없다. 예컨대 카드 재발급을 하려면 영사관까지 찾아가서 문서 공증을 거쳐야 한다. 최근 또다른 일거리가 하나 생겼는데, 간단한 행정 절차를 위해 직접 법원에 가야 한다기에 머나먼 남미에서 지금 골머리를 썩히는 상황이다. 이런 모든 상황은 ‘내가 나라는 것을 해외에서 증명할 방법이 본인이 현장에 나타나는 것 말고는 현재 대한민국에는 없기 때문’이다.
‘IT 강국’을 자칭하는 나라치고는 대응이 늦어도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싶다.
아래는 에스토니아 정부 관계자들과의 인터뷰 영상이다. 영어 자막이 기본으로 설정돼 있으므로 ‘설정’ 버튼에서 한국어 자막을 선택해 감상하면 된다.
■ 다큐멘터리 진행 상황
유럽을 뒤로 하고 도착한 샌프란시스코에서, 2007년 물리적인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삶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대중에 폭넓게 알린 ‘4시간'(원제 : The 4Hour Workweek)의 저자 팀 페리스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시카고에서는 직원들에게 근무지와 근무 시간의 자유를 포함한 최대한의 자유를 부여하는 경영 기법으로 10년째 상당한 지지층을 형성해온 기업, 베이스캠프(전 37시그널)의 창업자이자 CTO인 데이비드 하이네마이어 한슨(루비온레일즈 창시자)도 만났다. 조만간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고 돌아올 예정이다.
2 thoughts on “블로터닷넷 연재글 – 노마드를 위해 준비된 ‘진짜 IT 강국’, 에스토니아”
물론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나라의 절박한 환경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인사이트에 경의를 표합니다.
한국의 전산행정의 문제점에 대한 내용은 정말 공감합니다.
우리 나라가 시대의 흐름에 맞추려면 정부에서 담당 직원을 해당 분야 출신의 전문가로 배정하고
변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