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일은 일 년의 딱 절반이 지난 시점 무렵에 있어서 새해를 두 번 맞는 기분이 된다. 첫 반년을 돌아보고 나머지 반년은 어떻게 보내면 좋을지 생각하게 된다.
지난달, 이번 생일은 하던 일 다 내려놓고 홀로 스파가 있는 곳에서 하루 묵으며 호젓하게 보냈다. 종일 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가 책을 읽고 먹고 싶던 걸 먹고 창밖으로 스콜이라고 하는 게 맞을 거센 빗발이 도시를 덮는 걸 오래 지켜봤다.
그러던 와중에 필름 현상이 완료된 사진 파일이 도착했다. 필름 사진 특유의 색감이 참 고왔다. 두 롤을 꽉꽉 채운 사진들을 넘겨보다 보자마자 한눈에 이건 내 영정 사진으로 딱이다, 하는 걸 한 장 골라내어 사이즈에 맞게 현상 신청을 해두었다. 성수 대교 아래서 찍은 사진이다. 앞으로 10년 안에 내가 어떤 식으로든 죽는다면, 내 영정 사진은 이게 될 거다. 10년 뒤에도 내가 살아 있다면, 나름대로 그걸 또 기념하며 다음 10년용 영정 사진을 찍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번에 한국에 온 이유들 중 하나. 가깝다면 참 가깝고 멀다면 참 먼 사람이 어떻게 보면 허망하게도 세상을 떠났다. 내게 요구되는 여러 가지 뒷수습을 하는 동안 크게 별다른 생각을 하거나, 감정적으로 무너진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다 끝나고 나서 지금은 여러 가지 생각이 문득문득 잔잔하게 든다. 그런 거 있지 않나, 파도같이 감정이 몰려오는 것 대신 바람이 불 때마다 잔잔하게 수면에 물결이 끊임없이 이는 것 같은 것. 그러면서 이번에 유언부터 영정 사진까지 미리 준비해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유언장은 아주 간단하다. 가장 간편한 건 뭐니 뭐니 해도 자필 작성. 깨끗한 종이 한 장에 나의 인적 사항/유언내용/작성 연도와 월일을 적고 날인 또는 지장, 이걸로 끝. 난 이걸 별도로 표시한 하나의 클리어 파일에 넣어 두었다. 한 명의 지인, 한 명의 가족에게 파일의 생김새와 위치에 대해 이야기 해두고, 온라인에서 내 흔적을 정리하고 필요한 부분에 대해 소식을 알려야 하는 사람들의 메일링 리스트 등이 담긴 가이드라인 문서 파일에 접속하는 방법 역시 함께 넣어 두었다.
다른 방법들로는 녹음이나 공증인가 사무실에 가서 공정증서를 통해 작성하는 방법 정도가 있다. 두 경우 모두 2인 이상의 증인이(미성년자나 금치산자, 유언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나 직계 혈족 등은 불가) 함께 해야 하고, 후자의 경우 공증인이 유언장을 안전하게 보관해주는 대신 수수료가 든다(유언 가액의 0.15% + 21,500원). 가장 간단하고 지금 당장에라도 해둘 수 있는 건 자필 작성, 가장 확실한 건 공정인가 사무실을 통한 유언 공증.
지금은 영정 사진을 찍은 곳 근처에서 지내고 있다. 이제 한 달하고 반. 왔다갔다 하겠지만 겨울을 제외하면 아마 여기 종종 있을 것 같다. 머무르는 집이 위치한 동네를 어지간해서는 절대 안 벗어나는 내 성향 상 어떤 동네인가가 매우 중요한 척도인데, 여긴 지금까지 지내본 동네 중 베를린의 모처 등과 함께 세 손가락 안에 든다. 비가 오고, 고요하다.
2 Comments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늦었지만 생일축하드립니다!
겪어보니 당사자가 간략하게나마 미리 해두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사후처리 프로세스가 크게 차이가 나더라고요.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