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터닷넷 연재글 – 발리에서 ‘일’하는 사람들

*블로터닷넷 연재글입니다.

다큐멘터리 제작, 촬영은 시작이었을 뿐

첫 관문은 웹사이트였다. 생전 처음 한 줄 한 줄 버둥거리며 코딩을 하고, 페이팔스트라이프를 이용해 후원을 위한 결제 기능을 넣었다. 제작이 어느 정도 진행되기 전까지는 킥스타터인디고고 같은 크라우드펀딩 플랫폼을 사용할 계획이 없었기에, 그 전에 소액이나마 직접 자금을 조달할 생각으로 시도해 보았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첫 달에만 1만달러가 모였다. ‘킥스타터 없이 직접 크라우드 펀딩하기’에 대해 정리한 영문 블로그 글을 통해 입소문도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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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자 관리와 인터뷰 대상자 섭외, 장비 구입과 사전 촬영 등으로 눈코 뜰새 없이 두달여를 서울에서 지냈다. 그리고 4월 초 드디어 첫 촬영지로 떠났다. 바로 ‘디지털 노마디즘’이 뜬구름 잡는 화두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인 움직임이라는 걸 느꼈던 곳, 발리였다.

이들은 왜 길을 떠났을까

이제껏 여러 곳을 다니며 다양한 형태로 일을 해보았다. 하지만 시사 교양프로그램에서나 스치듯 들었던 디지털 노마드라는 삶의 방식이 나의, 그리고 우리의 삶과 조금이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거란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머물렀던 발리에서 단순히 여행이 아니라 더 나은 삶과 생산성이라는 확실한 목표를 가지고 길을 떠난 사람들, 샌프란시스코의 감당이 안 되는 사무실 유지 비용 대신 발리에서의 서비스 개발을 선택한 스타트업 팀과 같은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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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나름의 확실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생활비다.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특정 장소, 특히 대도시로 몰려드는 것은 비단 대한민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로 런던은 일자리를 목적으로 한 유럽 인구이동의 첫번째 목적지다. 사람들이 몰려듬에 따라 주거비를 포함한 생활비는 갈수록 상승하고, 샌프란시스코 같은 곳에서는 방 한칸을 얻기 위해 내야 하는 월세가 한화 200만원을 가볍게 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암묵적으로 사회 생활에서 요구되는 것들과 주변의 시선 역시 만만치 않다. 번듯한 집과 자동차, 또는 사시사철 새로운 옷이나 사교 활동 등에 드는 비용 같은 것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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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의 중저가 숙박시설 중 하나 (월 50만원 선)

세번째는 통근의 자유로부터 오는 다양한 삶의 선택지를 들 수 있다. 프리랜서,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 기업가 그리고 피고용인으로서 원격으로 근무하는 사람들은 물리적인 제약이 없다. 반드시 한 곳에 매일 같은 시간에 통근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사라질 때,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진다.

서울에서 매일 회사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에게는 파리 여행이 금전적인 부담 탓에 꿈도 꾸기 힘든 일일 수 있다. 만약 원격근무를 하게 돼 자신이 살 곳을 자신이 정할 수 있다면? 한동안 물가가 저렴한 곳에서 지낸 후 그 간 절약한 돈으로 파리든 어디로든 가면 된다. 장소의 제약은 사람들이 자신의 돈으로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할지,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지에 대한 결정권과 직접적으로 연관돼 있다.

이들에게 이러한 삶의 방식은 단순한 일탈이나 괴짜같은 행동이 아닌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이들에게 이러한 삶의 방식은 단순한 일탈이나 괴짜같은 행동이 아닌 지극히 논리적인 선택이다.

발리와 디지털 노마드

인도네시아의 1만8천개가 넘는 섬 중 하나인 발리가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발리 섬만의 독특한 문화와 전통 그리고 수준 높은 예술 작품들이 모여 만들어낸 발리만의 독창적인 분위기를 빼놓기 어렵다. 사람들의 삶의 질과 일하는 방식에 대한 생각이 변해가면서 이런 매력에 끌린 디지털 노마드들이 발리로 속속 모이고 있다. 다시 찾은 발리에서 나는 디지털 노마드들이 함께 여행을 하고 일을 하는 ‘해커파라다이스‘팀과 협업 공간 ‘후붓‘의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았다.

함께 일하고 여행하는 ‘해커 파라다이스’

30명 정도의 사람들이 함께 여행을 하고 일을 하며 지내는 해커파라다이스는 지난해 여름 코스타리카에서 1기를 진행했다. 올해는 베트남 페낭을 시작으로 인도네시아 발리, 태국 치앙마이 그리고 유럽으로 이어지는 일정을 함께 소화할 2기를 모집해 길을 떠났다. 개발자만 선발해 진행했던 1기 때와 달리, 2기에서는 다양성에 주안점을 두고 지원자를 선발했다고 한다. 과연 국적부터 종사하는 직업까지 각기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참가자들의 일과는 대략 이렇다. 카페나 빌라 등 각자 일하고 싶은 곳에서 일을 하고, 여가 시간에는 시간이 맞는 사람들끼리 바닷가로 서핑을 하러 가거나 산으로 하이킹을 떠난다. 함께 요가를 하러 다니는 팀도 있고, 현지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팀도 있다. 관심사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마케팅이나 프로그래밍 관련 워크샵을 돌아가며 진행하기도 하고, 매주 한 번씩 있는 팀 식사와 데모데이에서는 자신이 진행 중인 프로젝트 이야기 등으로 시간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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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한번씩 있는 팀 식사시간을 보내는 해커파라다이스

혼자 여행을 하면 될 걸 왜 3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우르르 함께 다니는지에 대한 의문도 잠시, 나는 곧 이런 단체활동이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음을 발견했다. 실제로 참가자 중 절반 정도가 이번 여행이 처음으로 해보는 장기 여행이라고 대답했다. 누군가는 근무지에 물리적으로 얽매여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서는 선뜻 길을 떠날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커뮤니티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우고 또 안심이 된다는 이도 있었다.

머릿속으로 이해하는 것과 실행으로 옮기는 것 사이의 간극은 크다. 해커파라다이스는 이 간극을 좁혀주는 역할도 함께 하고 있었다. 아래 영상에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다. 모든 영상은 ‘CC’ 버튼 또는 설정 버튼을 클릭해 한글 자막과 함께 감상할 수 있다.

발리 최초이자 최대 규모의 협업 공간 ‘후붓’

전세계에 차고 넘치는 게 협업 공간이다. 이 가운데 유독 후붓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언제든지 누구든 커뮤니티의 일원이 될 수 있는 편한 분위기, 대나무로 지어진 건물과 카페가 함께 있는 야외공간, 이따금 원숭이가 나타나는 마당과 책상 너머로 보이는 초록색 논은 많은 사람들이 다시 이 곳으로 발걸음을 향하게 한다. 아래 영상에서도 볼 수 있는 원숭이는 언뜻 보기엔 귀엽지만 막상 가까이 가면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고 음식물을 훔쳐 달아나기도 하는 등 상당히 얄미운 존재이니 조심하시라.

지난해 하반기를 기점으로 후붓이 각종 미디어에 노출되면서 부쩍 방문자가 늘어난 탓에, 인터넷 속도 저하 등으로 회원들이 불편을 겪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 후붓 쪽에서는 현재 확장 또는 이전을 고려 중이라고 한다. 애초에 발리의 인터넷 속도는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느리다. 단독주택의 경우 비교적 빠른 인터넷 전용 회선을 설치한 곳도 있으니, 장기로 지낼 곳을 계약하기 전에는 인터넷 속도 테스트를 반드시 해보길 추천한다.

후붓의 공동 창업자인 피터 월과도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피터 월은 캐나다의 공영 방송국 <CBC>에서 10년 동안 일한 베테랑 저널리스트이다. 그는 디지털 노마디즘이 극단적인 예일 수는 있으나 또한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임을 강조했다. 그는 빠르게 변하고 있는 고용 시장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데 특히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아래 영상에서 짤막하게나마 확인하길 바란다.

정규직이라는 고용 형태 자체가 꾸준히 감소할 것이라는 전망은 드라마 ‘미생’을 봐도 알 수 있듯, 비정규직에 대한 엄청난 공포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다. 이는 유독 한국에서 고용주, 고용인 양쪽이 누려야 하는 유연성과 혜택을 고용주 한쪽에서만 누리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기도 하다. 기업들은 인건비 절감 등의 이유로 갈수록 정규직 채용을 줄이고 있다. 그리고 노동 시간 대신 완료한 업무 단위로 임금을 지급받는 정규직 이외의 고용 형태(프리랜서, 파트타임, 비정규직 등)는 갈수록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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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nline Work Revolution Rich Pearson Elance-oDesk iRecruit 2014 Presentation (http://www.slideshare.net/hrtecheurope/elance-odesk-i-recruitdeckrichpearson)

프리랜서를 위한 플랫폼 중 가장 규모가 큰 오데스크(oDesk, 최근 업워크로 사명을 변경했다) 발표에 따르면 2020년께 미국 경제인구의 절반이 프리랜싱 형태로 일을 할 것이며, 관련 시장 규모는 470억달러, 우리돈 52조원 가량으로 예측된다. 이와 함께 기계를 통해 현존하는 업무 중 상당수가 자동화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가까운 미래를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이러한 변화는 디지털 노마디즘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촉진시켜 사람들이 보다 창의적인 일에 종사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삶을 누리도록 할까. 그렇지 않으면 기본소득과 같은 사회적 의제가 충분히 논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되레 수많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에서 도태되게끔 만들까. 더 많은 이야기는 내년 상반기 완성될 다큐멘터리에서 확인해주시길 바란다.

다음 이야기는 태국 이야기와 함께, 이 신들의 섬 발리에서 어떻게 내 현금인출카드가 감쪽같이 복제되고, 눈뜨고 일어나니 400여만원이 통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4 thoughts on “블로터닷넷 연재글 – 발리에서 ‘일’하는 사람들

  1. WoW 코딩 직접 하신거였네요!
    페이팔로 후원방식 직관적이고 간결해서 좋더라구요 🙂
    틈틈히 응원하겠습니당!

  2. 좋은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되었고 저도 관심이 생기네요..
    이런 직업을 삼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도 궁금해요.

    1. 안녕하세요. 남겨주신 내용 관련해서 먼저 말씀드리면, 디지털 노마드는 ‘직업’이 아니라 원격근무를 통해 상대적으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고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회사가 마침 원격근무를 시행하는 곳이거나, 상사와의 협상에 성공했거나, 원격근무 시행사로 이직했거나, 클라이언트를 잘 만났거나, 장소에 크게 구애 받지 않고도 운영 가능한 자신의 사업체가 있는 상황인 것일 뿐인 거고,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따라 이런 경우의 수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봐주시면 좀 더 현실적인 접근이 쉬우실 것 같아요. 몇몇의 소위 ‘쿨한’ 사람들의 선택지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비법’ 같은 꿈같은 소리가 아닌, 기술의 발전에 따라 좀 더 합리적인 형태의 일과 삶을 목표로 변화해가는 수많은 패러다임 중 하나, 그 뿐인거죠. 디지털 노마드에 대한 흔한 오해들 7문 7답 https://dareyourself.net/3532 같은 글들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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